여론마당(오피니언)

합천향토사연구회 정유년 신년 창의사 참배 (3)-이성동

이성동
논설위원

▲임진왜란 극복의 선봉역할을 한 합천의병

 

남명(南冥) 문인들의
의병창의(義兵倡義)
합천 사람들은 나라가 평화로울 때는 국태민안(國泰民安)에 힘을 쓰고 어지럽거나 위태로울 때는 나라를 위해 신명(身命)을 바쳤다. 국난을 당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할 조정이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위태로울 때는 관군보다 우리 민중이 먼저 일어섰다. 선비는 붓을, 농부는 괭이를 던지고 창과 칼을 잡고 싸움터로 달려갔다. 이것이 우리 합천의 의병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 합천의병을 효시(嚆矢)로 전국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과 싸웠다.
고을 안의 선비들이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사방에 격문을 보냈다. 경(敬)과 의(義)를 주지(主旨)로 하는 실천유학의 거유(巨儒)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인 정인홍은 장령 벼슬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동문인 곽률(郭律), 김면(金沔) 등과 뜻을 같이하고 합천을 비롯하여 초계, 삼가, 거창, 안음, 함양, 고령, 성주 등 이웃 고을에 통문을 보내자 그의 문인(門人)인 박이장(朴而章), 하혼(河渾), 권양(權瀁), 조응인(曺應仁), 문홍도(文弘道) 등을 핵심으로 본군(本郡) 의병 1천 6백여 명의 장정이 모여들었다. 관찰사 김수(金睟)는 합천, 삼가, 초계, 고령, 성주 등 5읍 군대를 그에게 소속시켜주었고,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보내 중위장(中衛將)으로 삼도록 했다. 후에 고령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휘하에 들어왔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김면과 더불어 의병대장의 직책을 부여받고, 의령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영남 삼대 의병대장에 임명되었다.
초계와 삼가에서도 의거(義擧)를 했다. 초계에서는 5월 초순에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이 주동(主動)이 되어 일어났고, 삼가에서는 윤탁(尹鐸), 윤선(尹銑) 종형제와 박사제(朴思齊) 등이 앞장서서 창의(倡義)하고 군량을 모았다.
5월 하순 정인홍, 의병군은 3천명 정예군사로 전투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거창의 김면(金沔), 초계의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고령의 김응성(金應聖) 성주 일면을 지키는 문려(文勵), 이홍우(李弘宇) 등 의병장들과 연계하면서 경상우도(慶尙右道)일대의 토벌작전을 총괄하여 수행하게 되었다.
경상우도 의병들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침략군에 대한 반격작전이 강화되어 해전에서의 잇따른 수군(水軍)의 승리와 함께 전황(戰況)을 역전시키는 데 의병군이 크게 이바지하였다. 합천 의병의 주요 전적(戰績)을 보면 무계진(茂溪津) 전투, 사원동(蛇院洞) 전투, 초계전투, 현풍전투, 안언역(安彦驛)전투, 진주성 지원작전, 반년에 걸친 성주성 수복작전, 나아가 개령(開寧)의 7번대 공위(攻圍)작전 등인데, 이를 통해서 오늘날 세계문화 유산이 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수호하고, 왜구가 병참물자로 사용할 호남의 곡창지대 진출을 막음으로써 왜군들의 전의(戰意)를 상실케 하였음은 물론, 패퇴만을 거듭하던 관군의 반격태세를 갖추게 하는 동시에 명나라 지원군이 도래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명군(明軍)의 참전으로 1월 초순 평양성에서 패퇴한 왜군은 4월 중순에는 한성(漢城)을 버리고 일제히 남하 퇴각하였다. 경상도 일대의 적 제7군도 계속된 우리 의병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해, 2월 4일 거점인 성주성(城州城), 16일에는 개령본진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합동작전을 펴고 있던 영호남의 모든 군사가 어울려서 선산(善山)의 왜군을 공격하였다. 이후 전쟁은 소강상태에 이르고, 강화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달라서 3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고, 다시 일본군이 침입하였다.(정유재란의 시작) 이때 조명(朝明) 연합군은 북상해온 왜군을 직산(稷山)에서 격파하고, 남쪽으로 격퇴시켰다.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적의 수군을 명량해전에서 크게 무찔렀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점차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은 도망하는 적수군 수백척을 노량(鷺梁)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노량대첩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란은 끝나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