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의 인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바로 읽자(4)-류해을
류해을
합천문화원 이사
그때 화엄종의 찬기(賛奇) 스님께선 송경(松京 : 현 개성)의 법왕사(法王寺)에 계셨다. 꿈에, 대사께서 부처님 정수리 연꽃 위 공중에 서 계시는데, 부처님과 연꽃이 하늘에 가득 하였다. 깬 뒤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절 안의 대중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듣는 이들도 이상한 일이라 하였다. 얼마 뒤에 부고가 오니, 대사께서 돌아가셨을 때가 바로 그 꿈을 꾼 시각이었다. 대사께서 저술하신 『인공음(印空唫)』에 문정공(文靖公 : 이색)께서 서문(序文)을 쓰시고, 대장경으로 간행하여 용문사(龍門寺)에 봉안하니, 문정공(文靖公 : 이색)께서 그 끝에다 발문(跋文)을 쓰셨다.
대사의 성품은 순박함을 좋아하시고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으셨다. 먹는 음식은 매우 소박하게 하시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남에게 주셨다. 대사께서 일찍이 “팔만가지 수행 중에서 영아행(嬰兒行)이 으뜸이라.” 하셨는데, 모든 베푸심을 말씀하신 대로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공손히 대하시고 물(物)을 지극히 사랑하신 것은, 모두가 지극하신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억지로 힘쓰신 바가 아니니, 대체로 천성이 그러하셨던 것이다.
신 계량(季良)은 삼가 절을 올리고 머리를 숙여 탑의 이름 ‘자지홍융(慈智洪融)’이라 하고, 이어 명(銘)을 올립니다.
대사의 도(道) 드높아, 쉽사리 생각할 바 아니니, 선각(禪覺 : 나옹의 시호)의 적자이며 성조(聖祖 : 태조)의 스승이셨네!
대사의 평상시는 어린아이 같으시나, 안목 갖춘 자와의 만나면 화살촉을 서로 겨누는 것 같았다.
바리때 하나, 옷 한 벌, 겸손하고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셔도, 더할 나위 없는 존숭을 받으시니, 본래 지니신 성품 같았다.
가거나 나아가시되, 선견(先見)에 구애되지 않으시고 하늘이 내리신 수명이 칠십을 지나 아홉을 더하셨네.
오신 곳은 어디인가? 햇살이 품을 비추었고 가신 곳은 어디인가? 연화의 위로다.
곳곳에 제자들이 대사의 행적을 드러내려 하는데 천지 사이에 돌보다 굳은 것 없기에 명을 새겨 영원히 후세에 보이노라.
무학왕사비 음기(無學王師碑 陰記)
우리나라의 세 분의 조사(祖師) 지공(指空) · 나옹(懶翁) · 무학(無學)의 사리를 안치한 탑과 사적비(事蹟碑)가 양주(楊州)의 천보산(天寶山) 북쪽 벼랑에 있으니,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의 두 비는,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이 글을 짓고, 한수(韓修)와 권중화(權仲和)가 써서 고려 말에 세운 것이다.
무학(無學)의 비는 태종께서 즉위하신지 10년(태종 10, 1410년)되던 해인 경인년에, 왕명을 받들어 문신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써서 두 분 왕사(王師)의 탑 아래에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절은 폐허가 되었고 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금상 21년(순조 21, 1821년) 신사년에 이응준(李膺埈)이란 자가 술사(術士) 조대진(趙大鎭)과 함께 사리탑을 헐은 뒤 자기 아버지를 묻고, 지공(指空) · 무학(無學)의 두 비를 두들겨 부쉈다.
관찰사가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임금께서 깜짝 놀라시어, 이응준(李膺埈)과 조대진(趙大鎭)은 섬으로 유배하고, 이응준(李膺埈) 아비를 묻은 무덤을 파버리라 명하셨다. 이어 “부서진 비는, 개국 초에 선조의 분부에 따라 세운 것인데, 오늘날 보존치 못함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말씀하시며, 경기(京畿) 감영(監營)에 명하시어 일을 주관토록 하였다. 지공(指空)의 비는 문정공(文靖公)의 후손인 목사(牧使) 의현(義玄)에게 다시 쓰게 하고, 무학(無學)의 비는 많이 훼손되지 않았으므로 예전에 새긴 공부(孔俯)의 글씨를 모방하여 새기도록 하였다. 무자년(순조 28, 1828년) 가을에 공사가 비로소 끝나 옛터에 세웠다.
지공(指空)과 나옹(懶翁)은 중국으로부터 와서 고려 말에 부처의 가르침을 폈다. 무학(無學)은, 그들의 도(道)를 이어받아 개국 초기 수도(首都)를 정할 때에 공로가 많았으니, 기록으로 남길만한 분이다. 회암사(檜巖寺)에 세 분의 비를 함께 세운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 갑자기 비가 훼손당한 것은, 이 또한 불교의 한 수난이리라.
상감께서 지난날의 감회를 서글퍼하시며, 담당 관리에게 그윽이 명하시어 한 번에 거듭 새롭게 하도록 하셨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던 옛 자취가 이 때문에 다시 훤해지고 더욱 멀리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훌륭한 성인의 옛 자취를 쫓고 공로를 기념하는 성대한 의식이 아니겠는가?
이에 전말을 갖추어 비의 뒤에 기록하노라.
숭록대부(崇祿大夫) 행 용양위 상호군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사 원임 규장각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우빈객(行龍驤衛兼上護軍弘文舘大提學藝文舘大提學知成均舘事原任奎章閣提學都捴府都摠管世子右賓客) 김이교(金履喬)가 덧붙여 쓰고,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수원부유수 개성부유수 강화부유수 광주부유수 순찰사(京畿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水原留守開城留守廣州留守巡察使) 김겸(金鎌)이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자년(순조 28, 1828년) 5월 일에 세우다.
주사도감동 인봉당 덕준 봉은사 수선종판사 회선스님 성암당 영철, 부간역 기암당 의관 전판사 환허당 등환, 물력차지 가선 희행 봉선사 수교종판사 평송당 보채, 남한도총섭 취봉당 관활 공원 가선 최인스님, 중군 가의 의찰스님 도암당 성기, 북한도총섭 가의 성묵스님 영장당 옥인, 중군 가의 도문스님 추담당 삼학, 용주사 도총섭 제방대법사 긍준 인성당 의현, 중군 가선 정우스님 산인 신경, 각수 박지춘, 석수 박종석 문수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