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향교 연혁 _기고(전호병)
삼가향교 연혁 _기고
월허 전호병
합천군향토사연구소 회원

2015년에「삼가 기양루(岐陽樓) 이야기」를 합천문화원의 합천문화(陜川文化)誌에 싣고 「삼가향교(三嘉鄕校)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2016년 5월 26일자 합천신문에 최상호 대선배님께서 기고(寄稿)한「삼가향교 연혁」제목의 글을 20여일 전에 읽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반가웠다. 내용 중에서 “가수현(嘉樹縣)은 현재의 가회(佳會)지역이고, 봉성현(鳳城縣)이 현재의 삼가(三嘉)지역이었다.” 와 “삼가현청(三嘉縣廳)이 삼가면 금리로 옮겨온 시기” 에 대한 이견(異見)을 조심스런 마음으로 제시해본다.
① 기산(岐山)과 마장(麻杖)이 삼기현(三岐縣)의 별칭(別稱)이며, 봉성(鳳城)이 가수현(嘉樹縣)의 별칭이라고 사서(史書,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가수현은 삼가현의 옛지명(古地名)이다.
②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경상도/진주목/삼가현 편에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가수현 서쪽 감한리(甘閑里)에 있다.” 고 되어 있고, 10여 년전에 가회면 장대리에서 가마터와 유물이 발굴되어 주목을 받고 확인된 바 있다. 삼가의 서쪽 = 가수현의 서쪽
③ 세종 21년 기미(1439) 3월 삼가현의 관청을 가수현으로 옮기다 (조선왕조실록)
경상도 고가수현(古嘉樹縣) 백성들이 상언하기를 “현감의 소재지 삼가현(三嘉縣)을 본현으로 옮기게 하옵소서.”하매 그 도의 감사와 일찍이 2품 이상을 지낸 사람들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삼가현의 관청을 가수현으로 옮기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라고 되어있는데 – 감사와 2품 이상을 지낸 이들이 교통이 좋은 삼가(古嘉樹縣)가 적지(適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숙종 25년(1699)의 삼가현읍지에 “태종합량현개금명치감무이치소어가수후우이어봉성우개금명(太宗合兩縣改今名置監務移治所於嘉壽後又移於鳳城又改今名)” 가수로 옮겼다가 봉성(鳳城)으로 옮겼다..“ 에 근거하여 의문이 시작되었는데 숙종 25년(1699)은 현청이 이곳으로 옮긴지 약 300년이 지난 기록이라 “가수와 봉성을 다른 지역으로 오인(誤認)하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회 동헌설(佳會東軒說)과 대병면 향교는 고증이 될 기록이 없으니 說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현재의 삼가지역에의 양전리와 소오리의 고분군(古墳群)은 고읍(古邑)임을 알 수가 있다. 사서(史書)에 있는 이 지역의 지명을 정리하면 “이 지역은 가주화현(加主火縣)에서 통일신라의 경덕왕(景德王)때 가수현(嘉樹縣)으로 바뀌었고, 조선(朝鮮) 태조(太祖) 3년(1394)에 삼기현(三岐縣)의 속현이 되었다. 태종(太宗) 14년(1414년)에 삼기현과 가수현의 첫 글자를 따서 삼가현(三嘉縣)이 되었고, 세종 21년(1439)에 현재의 이곳(古嘉樹縣)으로 현청(縣廳)이 옮겨지고, 고종 32년(1895)에 삼가군(三嘉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1914년에 일제(日帝)에 의해서 폐군(廢郡)이 되어 합천군(陜川郡)에 속(屬)하게 되었다.” 로 정리가 된다.
삼가향교에서 2007년에 “삼가향교현판집성(三嘉鄕校懸板集成)”을 발간하였고 추향(秋享) 시에 필자도 참석을 하였는데, 허오도(許午道, 가회출신) 전교(田校)께서 “삼가향교의 정확한 창건연대의 기록이 없었는데 성균관에 갔더니 공민왕(恭愍王)때 삼가면 어전리(漁田里)에서 창건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더라.” 하는 설명과 함께 참석자들에게 1권씩 나누어 주었다. 아래는 “삼가향교현판집성”에 실린 연혁의 처음 일부이다.
본 향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53~1375) 때에 현 삼가면 어전리(於田里)에 창건하였고, 조선조 세종 때 중건하고, 1520년(중종15)에 중수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교궁(校宮)이 전소(全燒)되었다. 난이 평정된 뒤 1602년(선조35)에 임시로 교궁의 형태만 갖추어 운영해 오다가, 1612년(광해군4년)에 금산(錦山) 아래 염풍정(廉風亭) 계변(溪邊)에 재건하였고, 1646년(인조24) 1654년(효종5년) 1667년(현종8) 1683년(숙종9년) 1788년(정조12)에 각각 교궁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향교 자리가 낮고 습지라고 하여 1826년(순조26)에 북산(北山, 원금) 아래로 이건하였다가 다시 1871년(고종8)에 금산(錦山, 교동)아래 현재 위치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삼가향교의 책임 있는 직임(職任)에 있는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바라며, 삼가향교와 삼가역사에 많은 연구를 하시고 기고(寄稿)를 하여주신 최상호 대선배님께 경의(敬意)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