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기양루(岐陽樓) 이야기(1) -전호병

월허 전호병
합천군향토사연구소 회원
우리는 어제를 만들면서 살아간다. 무수한 어제라는 역사를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신생아도 어머니 뱃속에서 자란 어제가 있듯이 어제의 역사가 없는 오늘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역사나 문화재는 고리타분하고 시시한 분야라고 도외시하는 경우가 많고, 할 일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어제를 살펴서 미래를 짐작할 수 있듯이 역사를 배우고 문화재를 공부하는 것은 미래를 공부하고 미래를 배우는 것이며, 미래를 밝혀주는 등불이 되는 것이니 소홀히 할 분야는 아닐 것이다.
– 2016년 11월 24일에 향토사연구소 회원들의 현장조사가 있어 준비 했던 자료를 조금 보완한 것입니다. –
합천문화원 총서70인 합천문화(陜川文化) 2015 제33호에 실린 필자의 “삼가 기양루(岐陽樓) 이야기” 는 오류가 많은 현재의 기양루 안내문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적이기에 필자가 속한 “합천군향토사연구회” 회원님들과 현장조사를 의논하던 중에 “조목조목 설명을 하고 고증(考證)이 되는 자료가 있으면 상세하게 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현재의 기양루 안내문을 짓고 검증(檢證)한다고 수고했을 경상남도 문화재전문위원(교수)과 합천군청의 담당자 등의 여러분을 생각한다면 너무 상세하게 지적하기가 송구하여 대충 지적하였는데 이제 오류를 상세하게 지적하고자 한다.
현재의 기양루(岐陽樓) 안내문
이 누각은 동편에 관아 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삼가현성 (三嘉縣城) 안에 있던 관청의 부속 건물로 보인다.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건물에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지방관공서 건물이 15세기에 많이 지어졌으므로, 그 무렵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기양루라는 이름은 이 지역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의 지명이 통일신라의 경덕왕 (景德王, 742~765 재위) 때 삼기현(三岐縣)에서 강양군 (江陽郡)으로 바뀐 적이 있었는데, 이 지명에서 ‘기’ (岐) 와 ‘양’ (陽) 두 글자를 따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관청건물의 이름을 지을 때 흔히 사용 되었다.
이 건물은 현재 합천군 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기와 누각으로 2층 마루가 넓고 사방이 트이게 만들어 졌으므로 주로 연회용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함양군 안의면 (安義面 ) 에는 조선 태종 때 세워진 광풍루(光風樓) 가 있는데, 기양루와 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현재의 「기양루 안내문」오류를 보자면 첫째, 동편에 관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삼가현성 안에 있던 부속 건물로 보인다.
기양루 앞의 도로는 오래 전부터 삼가현청 앞의 길(道)이었음을 알 수 있으니 당연히 문루가 아닐까 의심해봐야 하는데, 삼가현성 안의 부속 건물로 본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둘째.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1597년) 유월 백의종군 시 초계진영으로 가는 도중 삼가를 지날 적에 비가 많이 오는 이유로 2박3일을 묵었지만 모친상중(母親喪中)이고, 난중일기에도 없는 기양루에 올랐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2일.《晩到三嘉, 則主倅已往山城 宿于空館》
셋째. 이곳의 지명이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삼기현(三岐縣)에서 강양군(江陽郡)으로 바뀌었는데, 이 지명에서 ‘기’ (岐)와 ‘양’ (陽) 두 글자를 따왔을 것이라 여겨진다.
경덕왕 때 삼지현(三支縣)에서 강양군(江陽郡)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삼기현(三岐縣)으로 바뀌었는데, 합천의 지명인 강양(江陽)이 등장한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기’(岐)는 기산(岐山)에서 ‘양(陽)은 남녘 남(南)으로 사용되며 산남수북왈양(山南水北曰陽)이 춘추 곡량전(春秋穀梁傳)에 있다.
① ‘기’(岐)는 섬서성(陝西省, 산시성)의 기산(岐山, 치산)은 주(周)나라의 발상지(發祥地)라 우리나라와 일본까지도 지명(地名)에 기(岐)字를 더러 사용하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삼기현(三岐縣)으로 바뀔 적에 기(岐)를 사용하고 기산(岐山)을 별칭(別稱)으로 사용하였으며, 가수현(嘉樹縣)은 기양(岐陽)을 별칭(別稱)으로 사용하였다고 보여 진다.
(초계면 출신 영남의 대학자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 선생께서 찬(讚)한 “삼가향교중수상량문(三嘉鄕校重修相梁文)” 에서 기양(岐陽)이라는 삼가의 옛 지명(地名)을 사용하였고, 이 지역의 문중(門中) 기록에 삼가가 기양(岐陽)이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산(岐山)과 마장(麻杖)이 삼기현(三岐縣)의 별칭(別稱)이며, 기양(岐陽)도 봉성(鳳城)과 같은 가수현(嘉樹縣)의 별칭이었다고 보여 진다.
三支縣/岐山(別稱)/三岐縣/麻杖(別稱) -삼기현(現대병)의 지명(地名)
嘉壽縣/岐陽(別稱)/嘉樹縣/鳳城(別稱) -가수현(現삼가)의 지명(地名)
②‘양’ (陽)은 볕, 양지, 밝음 등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기양(岐陽)에서는 남녘 남(南)의 의미로 사용되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산남수북왈양(山南水北曰陽)이 있다.
경남 하동군의 악양(岳陽)은 중국의 악양(岳陽)과 지세가 닮아 지명을 차용하였는데, 山南水北曰陽(지리산 자락의 형제봉 남쪽 동네)에 부합된다. 그 시기도 같은 통일신라 경덕왕 때이다. (서울의 옛 이름인 한양(漢陽)도 한강(漢江, 漢水)의 북쪽에 있는 도읍지라는 의미이고, 합천의 옛 이름인 강양(江陽)도 강의 북편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중국 섬서성(陝西省, 산시성)의 기양(岐陽, 치양) 역시 기산(岐山, 치산)의 남쪽에 있는 읍(邑)이라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