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향토사연구회 정유년 신년 창의사참배 (4)-이성동
합천향토사연구회 정유년 신년 창의사참배 (4)
이성동
논설위원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 합천창의사)의 유물관에 들어가면 입구 정면 현관 벽에 걸려 있는 「무계 전투도」부조를 만날 수 있다. 경북 고령군 무계는 정인홍 의병군이 왜적을 격파했던 전투장소이다.
匹馬經過構戰場
필마로 옛 싸움터를 지나노라니
江流遺恨與俱長
강물은 한을 품고 길게 흐르네
於今誰唱和戎說
지금 누가 왜적과 강화를 말하는가
將士當年枉死亡
장사들이 그때 원통하게 죽었거늘
창의사 유물관에 걸려있는 정인홍이 이 시를 지은 1595년, 평양과 서울에서 후퇴한 왜적들이 남해안 일대를 점령하고 있는데도 조정 일부에서는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자고 주장했다. 배후에는 명(明)이 있었다. 일본군이 평양성을 차지하고 있던 1592년 9월 이래, 명나라가 꾸준히 제기해 온 강화논리를 조선 대신들이 대변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인홍은 시를 지어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4부로 나뉘어 있는 유물관 내부
유물관 내부는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임진왜란 발발, 2.전국 의병의 활약, 3.합천의병의 활약, 4.합천의병의 맥 등 임진왜란 당시 전국 상황, 전국 의병활동, 독립운동으로 연결된 의병정신과 주요 전투상황을 잘 요약해 놓았다. 이중 중요한 몇 가지 주제를 선별해 아래에 소개한다.
임금과 조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남명 조식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인 1555년(명종 10) 5월 왜구들이 70여척의 배로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 영암, 강진에 침입해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을 포로로 잡아간 을묘왜변이 발생했는데, 몇달 뒤 10월에 왜구들이 그들의 목을 베어 바치자 조선 조정은 그들을 용서하고 무역선도 다섯 척 증가시켜 주었다.
남명 조식은 이때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왜구가 침입하여 무인지경이 되었으니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하를 대하는 것은 엄하면서 왜구를 사랑하는 자비심은 망해가는 송나라보다 더 합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 후 조식은 장차 왜침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문도들에게 무예를 장려하고 병법을 강론하였다. 스승이 그러했으므로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도 일대에서 조식 선생의 문하생들이 향민들과 기병하여 전국에서 가장 으뜸가는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의병활동의 중심지 경상우도와 합천
경상우도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군량미 등 병참지원과 의병활동에 유리한 지형지세, 경의(敬義) 사상적 맥락에 기초한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이 의병창의의 발화점(發火點)이 된 것이다. 후일 실학자 이익(李瀷)은 퇴계와 남명을 좌·우도의 대표적 학자로 거론하면서 좌도는 상인(尙仁)이요, 우도는 주의(主義)라 하여 남명학파의 창의정신(倡義情神)을 높이 평가하였다.
여기에 걸려있는 전시판 ‘의병 활동의 사상적 기반’도 경상우도 지역에서 의병이 특히 크게 일어난 까닭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남명은 대담하고도 과격하게 임금을 비롯한 위정자(爲政者)들을 비판하여 대오각성을 촉구하였는데, 남명의 이 같은 자세는 국난을 당하여 문도들로 하여금 모두 창의토적(倡義討賊)에 앞장서게 하는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