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

|수필|홍약국 아들-정병수

정병수
쌍백초등학교 총동창회장

서울에서 천리길인 고향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기동창이 지금도 몇명 있기는 하지만 편하게 얘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벌초 때문에 고향에 갔다가도 선 채로 안부를 전하고 그냥 헤어지곤 했다. 각자 사는 지역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른데다 고향에서 1시간 늦게 출발하면 서울 도착은 2~3시간 늦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0여년쯤의 일이다. 그날도 고향에서 대충 일을 보고 서울로 출발하려는데, 인근 면(面)출신의 중학교 동창이 내 앞에 차를 멈춰 세우는 것이다.
“병수야, 반갑다. 고향엔 어쩐 일이고?”,“반갑다. 찬유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그냥 그렇지 뭐.”, “너 보니 생각나는데, 동창생모임을 가지면 어때?”, “좋지. 서울에서 네가 주선을 해 봐라!”
이렇게 해서 전국 각지에 있는 중학 동기생 중 생각이 비슷하리라 예상되는 10여명을 골라, 2년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하기로 했다. 어느새 햇수로 10여년이 되었다.
우리나라 60년대의 시골 중학교는 몇 개의 면을 통틀어 중심지역에 하나 정도 있었다. 그런 지역에는 5일장도 열리고 인근 면에는 보기 드문 수동식 전화도 있었고, 자장면집도 있었으며 조그마한 서점도 있었다. 그러나 병원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약국도 드물었다. 그래서 병원이 없는 시골 약국은 단순히 약을 판매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병 진단과 처방까지 하는 수술없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고향에서 그런 역할을 한 곳이 바로 5일장 어귀에 있던 백중(百中)약국이었다. 약사의 성이 남양 홍씨라 하여 백중약국보다는 홍약국이라고 더 많이 불리었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이 “홍 약국, 홍 약국”해서 귀에 익숙한 약국이었다.
당시 우리가 중학교에 진학할 땐 의무 교육이 아니었기에 입학시험이 있었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는 비록 시골이지만 5개 초등학교의 졸업생이 몰리는 유일한 중학교로 2대 1정도의 경쟁을 거쳐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초등학교 출신이 수석 입학을 하느냐 하는 것이 지역사회의 관심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당시 “체력이 곧 국력”이라고 하던 시절이라 체력점수의 비중이 컸는데, 체육에 약한 나는 상당히 불리했다. 합격자가 발표되고 난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체력장점수 때문에 내가 수석을 그만 놓쳤다는 것이다.
수석 합격자는 바로 홍약국의 아들인 홍찬유였다. 재수를 하여 입학한 때문인지 키도 큰 편이고, 인상도 좋았다. 성격도 성글성글하여 누구나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3년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다. 나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 살았기에 친구에 대해 잘 몰랐는데, 친구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1학년 말에 자퇴하고 그 후 자원재생공사에 근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남이 많을수록 친구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고, 그는 익은 벼와 같이 고개를 숙이는 겸손한 친구였다.
그 언젠가 내가 고향에서 차를 타고 오던 친구와 만난 것은, 친구가 독거노인에게 밥과 반찬을 무료 배달하는 중이었다. 물론 배달주체는 친구가 장로로 시무하는 교회이지만, 그 봉사를 친구가 주도하고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10년이 넘도록 묵묵히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자원봉사 흉내만 내다가 군의원이나 선출직 자리를 탐내는 사람이 많은 터라 친구가 다시 보였다.
친구의 자원봉사만 해도 보통사람들에겐 쉽지 않다. 그러기에 아름답지만 더 멋진 것은 색소폰연주도 한다는 것이다. 고향에 행사가 있을 때는 간혹 색소폰 재능봉사를 하는 모양이다. 더구나 성불사의 밤,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등 주옥같은 가곡을 작곡한 홍난파 선생이 둘째 아버지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홍난파 선생은 원래 수원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가 어릴 때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 그런데 친구의 아버님이 어떻게 해서 산골 중에 산골인 내 고향에 정착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사연은 친구의 아버님은 막내였는데 안과의사인 셋째 형을 따라 동래온천장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부산에 살면서 결혼을 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잠시 공기 좋은 처가(妻家)에서 휴양한다고 온 것이 그만 우리 고향에 삶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홍약국 아들인 나의 친구는 약사가 아니나, 부인이 약사라서 대를 이어 홍약국 즉, 백중약국를 운영하고 있다. 그 홍약국의 아들이던 친구도 이제는 환갑이 지나 칠순을 향하여 가고 있으며, 혼기에 든 잘생긴 아들도 둘이나 있다. 그러니 이제는 홍약국 아들이 아닌 홍약국의 남편으로나 또는 홍약국의 바깥주인으로 불리어야 맞다. 그러나 그것이 뭐 중요하랴? 중학교 시절 부르던 홍약국 아들이나 그냥 찬유라고 하면 그것으로 족하고 정겨운데 말이다. 다음 우리 모임 때는 친구들이 모두 지는 해를 등지고 앉아 와인이라도 한잔하면서 찬유의 색소폰 연주를 듣는다면 더 멋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