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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문화원회원 단종의 유배지 영월을 찾아서 (1)-이병생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합천문화원(원장 전정석)에서는 매년 실시하는 유적지 탐방계획에 의거 금년에도 5월12일 단종의 유배지 영월을 찾았다.
각 면에 배차된 차량에 의거 아침 8시까지 논공휴게소에 집합하여 아침 일찍 배웅 나온 하창환 합천 군수님과 한국전력 합천지사 김창수 지사장님을 비롯한 관계직원 여러분들의 환송을 받으며 회원 450여명이 14대의 차량 행렬로 영월을 향하여 떠나는 모습은 마치 한나라 국민의 대이동의 연상을 방불케했다. 아침부터 안개가 끼여 흐린 날씨로 곳곳이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으나 바람도 불지 않고 시원하여 유적지 탐방에 오히려 좋은 날씨였다.
단종은 1441년 7월23일(세종23년)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 현덕왕후는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를 나은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양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18일 문종이 재위 2년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자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난이후 1455년 6월11일 단종은 재위기간 3년2개월(1452-1455)만에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며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노산군으로 강복된 뒤 1457년 윤6월22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돈화문을 출발하여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만에 영월땅 주천에 당도했다. 주천에 있는 마을의 우물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갈증을 푼 뒤 공순원 주막에서 유배길 행차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이 지금도 ‘어음정’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다시 출발한 단종은 배일치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지금 배일치 고갯마루에는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창덕궁을 출발한지 7일후인 윤6월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1457년 여름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자 단종의 유배지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관풍헌은 조선초기에 영월 동헌 터에 지은 객사다.
넓은 마당을 두고 큰 건물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다.
해방 전에는 영월군청이 그 뒤에는 영월중학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 마당 앞 좌측에는 2층 누각인 자규루가 있다. 세종 때 영월군수였던 신권근이 세운 누각으로 본래 이름은 매죽루 였다. 그러다 단종이 관풍헌으로 옮겨오면서 누각에 올라 자신의 한을 담은 ‘자규사’라는 시를 짓고 나서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제
시름 못 잊어 누각머리에 기대었노라.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도다. 네 소리 없었으면 내 시름없었을 것을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나니 부디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그해 9월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24일 유시에 단종은 이곳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며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가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일행은 영월에 11시에 도착하여 단종의 장릉을 처음으로 찾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