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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랬던 남자 – 문경자

문경자 논설위원

봄비가 내린다.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리면서 가만가만 이야기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 나이 스무 살 즈음 일이었다. 어느 날 편지 한 통이 우리 집 철 대문에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겉 봉투에 씌어진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읽었다. 혹시 누군가 내 어깨 너머로 훔쳐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호랑이 같은 부모님께 들킬 까봐 걱정이 한 무더기로 모여 들기도 하였다. 겉봉투만 슬쩍 곁눈으로 훑어 보아도 단번에 연애 편지라는 것을 알았다. 괜히 얼굴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봄 햇살이 간지러움을 태우는 듯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한편으로 기쁨보다는 심란한 마음도 들기는 하였다. 겉봉투를 뜯는데 목련 꽃잎이 파르르 바람에 떨리는 것처럼 내 손가락 끝도 그렇게 떨고 있었다. 한 눈에 들어 온 글씨는 인쇄판에서 찍어 낸 것 보다 예뻤다. 멋진 글씨체로 써내려 간 내용은 핑크 빛 사랑으로 새하얀 백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경아 읽어 보셔요.’ 하고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고향은 어딘지 식상한 내용만 적혀 있었다. 설레는 아가씨 맘은 금방 타다 남은 잿불처럼 식어갔다. 나는 그만 실망을 하고 말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끈질긴 편지와 소식은 끊어지지 않았다. 우체부 아저씨는 편지가 너무 많이 오니 힘이 든다면서 일주일에 한 두 통만 배달하게 해달라는 부탁까지 하였다. 그래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명절에는 양말이나 손수건 등 가벼운 선물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 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으며 아가씨 연애 편지 왔나 봐요 하고는 농담도 걸어 왔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갱상도 남자가 그렇지. 무슨 달콤한 말을 쓰겠노. 너무나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석처럼 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꽃피는 봄이면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서울에서 그곳까지는 멀고도 먼 거리였다. 오랫동안 편지만 주고 받았다.
달콤한 말을 적어 보면 이렇다.

때로는 푸른 달빛아래 홀로 풀밭을 걸어요.
때로는 홀로 별이 흐르는 새벽을 보며 경이 생각을 해요.
어느 때는 진달래 꽃 길을 걸으며 그대와 손잡고 걷는 상상을 하지요.
여름에는 풀 벌레 우는 돌담 길을 걸으면 사랑의 노래 휘파람도 불어요.
그립고 보고 싶을 때는 그대가 보내준 사랑의 글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어요.
하는 글로 아가씨의 마음을 녹여주곤 하였다. 가끔 생각해 보면 몸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계절이 한 번 바뀌고 꽃 편지도 제법 많이 쌓여갔다. 부모님이 편지를 볼까 봐 가슴을 조이면서 나만의 비밀을 만들어 가는 것도 큰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봄이면 꽃이 피는 사연이 꽃잎같이 새겨지고, 여름이면 소나기 같은 사연을 꼭꼭 눌러 적어 보내고, 가을빗소리 들으며 사랑채에서 당신에게 띄우는 편지를 쓴다고 하는 내용을, 겨울에는 군불을 지피다가 당신이 추울까 봐 하얀 백지 위에 솜을 깔고 따듯하게 데운 사랑의 글자를 새겨 보낸다는 등 하면서 내 맘을 흔들어 놓았다. 그 남자의 달콤한 속삭임은 때로는 두 볼에 붉은 꽃이 피기도 하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혹시나 누군가에게 들킬까 조바심도 났다. 아직도 그때 그 순간이 떠 오르면 입가 미소가 번지면서 살짝 속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고무나무 잎이 누렇게 뜬 것처럼 변해있는 편지 속에는 행복이란 글자가 새겨진 은행잎이 그대로 붙어 있다.
언젠가 막내 아가씨가 “큰 언니 옛날에 오빠가 보내준 편지 한번 보여 줄 수 있어요.”하며 웃었다. “그럼요.”나는 보물이라도 보여 주는 기분이 들었다. 시집 올 때 시부모가 마련 해준 원목가구의 삼단 서랍장을 열었다. 그 속에서 잠자고 있는 꽃무늬편지 봉투 하나를 꺼내 주었다. 아가씨는 왼쪽 무릎을 세우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편지지에 씌어 있는 첫 대목을 작은 목소리로 읽었다. ‘경이 보세요.’그 동안 안녕. 나물 캐는 아가씨 분홍빛 옷자락에서 봄 향기가 풍겨 나오고… 파랗게 물들어가는 넓은 들판, 가까운 뒷산에는 철쭉이 만발을 해 더욱 내 맘을 설레게 합니다. 경! 꽃만 보면 좋아하는 모습이 멀리서나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하고 읽던 아가씨가 키득키득 웃으며 “언니 도저히 못 읽겠어요.”하는 말에 둘이서 한참 배꼽을 잡고 웃었던 때가 어제 일 같다.
지금도 그 편지를 읽다가 웃음이 나와 도저히 두 줄도 못 읽는다. ‘경아씨’이 세 글자만 눈에 들어와도 입안의 혀가 간지럽다. 이제는 그냥 눈빛만 보아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오는가 하면 때로는 장미꽃다발을 등뒤에 숨기고 현관문을 열어주는 순간 불쑥 내밀어 웃음을 짓게 한다. 성격이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봄비는 어제 밤부터 내리더니 아직도 멈추지 않고 내린다. 코고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고 잠든 얼굴은 평온하게 보였다. 장미가 새겨진 이불을 살짝 끌어다 덮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