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합천군종친회 정기총회 및 화합한마당

안씨 합천군 종친회 정기총회 및 화합한마당 잔치가 5월19일 오전10시30분 청덕면 두방리552번지에 위치한 문중재실 저존재 앞뜰에서 정재영 합천바르게살기회장과 부인 안정순 여사(탐진안씨), 문준희 전도의원, 안영규 순흥안씨대구부회장, 안희철 전대구은행지점장 등 내빈과 안영두·안술선·안영오 고문, 종친 200여 명이 함께 한 가운데 열렸다.
안대상 종친회장(원안 사진)은 인사말을 통해, “올해는 조상의 얼이 담긴 저존재 뜰에서 개최하였으며, 오늘 날씨가 좋은 것은 조상의 은덕같다”며 날씨를 칭찬한 후, “임진왜란때 우리 문중은 3대에 걸쳐 창의를 하여 풍전등화같은 나라를 구했던” 집안이라며, 안기 공과 아들 안극, 손자 안각.안철 등 4분의 위패가 대병면에 위치한 임란창의사에 위패 4위가 모셔져 있으며, 정인홍 창의장이나 의령 곽재우 창의장보다 훨씬 더 자랑스럽고 훌륭하신 우리 선조들을 후손들이 못나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후손으로서 아주 부끄러운 일이며, 앞으로 우리 조상을 만방에 알리고 잘 받들어야 한다며 연설을 해 종친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 안영규 순흥안씨대구종친회 부회장이 나서 저존재에 대한 소개와 모신 선조에 대한 소개를 하였다.
경남도문화재로 지정된 저존제(著存齋)는 노계 안우 선생과 뇌곡 안우 선생 두 분을 모신 탐진안씨 재실이다.
원래 두 분에 대한 제사는 청덕면에 있던 송원서원에 배향되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계속 모실 수 없게 되자, 1905년(고종42년)에 노계정사(노계 선생이 학문을 강설하던 곳. 1509년에 낙성되었으나 임진란에 없어짐) 옛터에 두 분 선생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추원사(追遠祠)와 그 재숙소(齋宿所)인 저존재(著存齋)를 건립하였으며, 매년 음력3월26일 제례를 모시고 있다.
저존재에 모신 노계(盧溪) 안우(安遇) 선생은 1449년(세종31년)에 뇌방리에서 태어나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어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늘 ‘함양성찰’을 관건으로 삼았으며, 점필제 선생도 늘 칭찬하였다. 동문수학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추강 남효은, 뇌계 유호인, 탁영 김일손, 묵재 노필 등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서로 교류하였는데, 추강의 사우록에 “사숙의 효행은 고을에서 으뜸이다”라고 하였고, “절조는 동한의 선비에 비길만 하고, 명리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라 평했다. 한훤당의 사우록엔 “시숙의 학문은 스승께서도 공경하였다”라 하였다. 전생서 주부, 안음 현감 등에 제수되었다. 만년에 귀향하여 창랑정에서 1627년(중종22년) 고종명하였다.
뇌곡(磊谷) 안극가(安克家) 선생은 1547년(명종2년) 뇌방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총민하였다. 12세에 구암 이정 선생 문하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1590년(선조23년) 부친을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향시에서는 수석을 차지하였고, 다음 해 신묘년에는 사마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과거는 사람을 나쁘게 만든다”라하고 최종 시험인 전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오직 유학에만 마음을 쏟아 한강 정구 선생과 서로 강마하였고 임진년 전투에서 부친인 찰방공이 왜적에게 살해당했을때 공께서 그 앞에 용감히 달려나가 울부짖으니 왜적도 차마 함께 죽이지 못하고 “이 사람은 참으로 효자다”라 하고 마을 앞 정자에 “충효리”3자를 써놓고 떠났다. 상중에도 둘째 아들인 철을 곽망우의 진중에 보내 의병을 이끌게 하였으며, 상복을 벗은 뒤 직접 낙동강 일대에서 함께 싸웠다. 사직서 참봉, 삼가 현감 등에 제수되어씅나, 사직하고 귀향하여, 정한강, 곽망우 등 제현과 끊임없이 종유하였고, 외재 이후경, 탁계 전치원, 설학 이대기, 매죽와 노극성 등과 늘 서로 도를 논하며 절차탁마하며 지냈다 1614년(광해6년) 68세되던 해에 고종명하였다.
한편 새로운 회장으로 안용갑 부회장이 선출되었다. /박황규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