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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합천향토사연구회 제2차 역사인물 및 유적답사 (5) – 이성동

이성동 논설위원

경연관이 되어 국왕을 교육하다
주세붕은 51세에 중종이 사망하자 중국사신의 제술관(製述官)으로 활동하였고, 이어 인종(仁宗)이 사망하자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중종,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에 명종(明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국왕을 교육하는 책임을 맡으며,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등 기묘명현을 신원(伸寃)하는 데에 힘썼다. 또한 그는 1549년(명종4) 55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는 해주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세워 그 지역 출신인 최충(崔沖)을 배향하였다. 57세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을 때는 승과(僧科)를 부활시키려는 문정왕후의 호불정책(護佛政策)을 반대하며 벽불소(闢佛疏: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를 올리기도 하였다. 1554년(명종9) 60세에 병으로 관직을 사직하고 그 해 7월 2일에 사망하였다. 조선을 유교 이데올로기로 통치하기 위해 그는 최고 통치권자인 국왕에게 경연(經筵)을 통해서 유학을 가르치고 60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뛰어난 정치인이었으며 유학자였다.
1677년(숙종3)에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18년(순조18)에 「문민(文敏)」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동림서원(棟林書院), 양근서원(楊根書院),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덕연서원(德淵書院), 도연서원(道淵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시문에 능하여 작품으로는 〈도동곡(道東曲)〉, 〈육현가(六賢歌)〉, 〈엄연곡(儼然曲)〉, 〈태평곡(太平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 8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죽계지(竹溪志)》, 《해동명신언행록(海東名臣言行錄)》, 《진헌심도(進獻心圖)》와 《심도이훈(心圖彛訓)》 있다. 아들 주박(周博)이 문집을 편집하였으나 전란으로 없어져 철종 10년(1859) 후손들이 편집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
일행이 주원식 선생의 해설을 10여분 정도 듣고 덕연서원과 무산서당 청덕각 등 주세붕 선생의 체취가 묻어있는 전각들을 둘러보았다. 무산사 한 쪽에는 새 건물을 올리는 건축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덕연서원 안에 들어서니 서원의 유래와 무산서당의 연혁, 그리고 신재 선생의 약사가 벽면에 현판으로 걸려 있었다. 덕연서원은 조선 선조 24년(1591)에 신재 주세붕 선생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림에서 뜻을 모아 동림서원(桐林書院)을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종 원년(1660)에 칠원현 남고(南皐)에 중건하여 남고서원(南皐書院)이라 불렀다. 그 후 숙종 2년(1676) 4월에 왕으로부터 덕연서원(德淵書院)이란 현판을 사액(賜額)받았으나 고종 5년(1868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911년 다시 덕연서당을 세웠으며 1964년에 중건 복원하여 그 후 계속 향례를 봉행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3량구조 팔작지붕인 강당은 가운데 3칸을 대청, 양측 1칸을 방으로 하였으며 전면에 퇴간(退間)이 없다.
강당 후면 높은 지대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문민공 신재 주세붕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그 우측의 덕연별사에는 1678년에는 특별히 별사(別祠)를 지어 청백리로 이름난 신재 주세붕 선생을 비롯한 정곡 배세적(裴世績), 주박(周博). 황협(黃挾), 주맹헌(周孟獻) 등 학덕이 높은 삼칠선현(三漆先賢) 즉 함안군 칠원읍, 칠북면, 칠서면 세 읍면지역의 다섯 분을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으며, 1983년 7월 20일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3. 고려동 유적지에서
고려 말에 성균관의 진사였던 이오(李午) 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이다. 관광객들이 많이 내방한다는 마을입구에 일행이 들어선 시간은 이날 오후 3시, 담장이 병풍처럼 마을 전체를 두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담안마을 또는 장내동(檣內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을 안을 들어서니 동네사람의 동정(動靜)은 전혀 없고, 낯선 이방인의 내방에도 개짖는 소리도 없는 적막한 마을이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고 한다. 이오 선생은 담을 경계로 담 안은 고려, 담 밖은 조선이라 하여 담 밖으로 일체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아들에게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이오는 함안 원북에 은거한 금은(琴隱) 조열(趙悅), 합천 삼가 두심동에 은거한 만은(晩隱) 홍재(洪載)와 함께 왕래하고 운구대(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마을 높은 곳에 있는 배처럼 생긴 바위)에서 시를 읊으며 살았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영남삼은(嶺南三隱)이라 불렀다. 그가 죽을 무렵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나라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느냐며 자신의 비에는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한자 없는 백비(白碑)를 세우도록 했다. 우리나라 전국에는 십여 개의 백비가 있는데 그 주인을 아는 백비는 효자 이온의 백비, 청백리 박수향 백비, 그리고 이오의 백비뿐이라고 한다.

귀로의 승합버스 안에서
일행이 고려동 유적지를 마지막 일정으로 둘러보고 귀로의 승합버스에 오른 시간은 이날 오후 3시경, 중도에 의령의 자굴산 입구 성문 망루(望樓) 위에 올라 30여분 망중한(忙中閑)의 여가를 즐기며 회원간의 우의(友誼)를 다지는 시간도 가졌다. 원근 낙동강연안에 기라성같이 나타나 한 시대를 풍미하며 명멸(明滅)해 간 가야제국, 그들 가운데 안라국인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서 우리는 선인(先人)들의 지혜와 찬란했던 문화를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었고, 또한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의 칠원 본가를 탐방함으로써 조선조정의 민중을 위한 도학정치를 실현시킨 그의 탁월한 교학정신(敎學精神), 그리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심으로 조선 개국을 반대하고 조선의 영역에 사는 것을 거부하며 고려인만이 사는 울타리를 쳐놓고, 후손들에게까지 일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진정한 고려인! 이오(李午) 선생의 충절을 현장에서 느낀 매우 소중하고 값진 하루 일과를 마치면서 우리 합천향토사연구회원들은 귀로의 승합버스에 올랐다. 차 안은 다시 오전처럼 합천향토사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날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그날 우리들의 함안지역 역사인물 및 유적답사가 보람되고 유익한 일정이 될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하며 심오한 지식으로 해설해주신 강재오 선생님과 신재 선생의 일대기와 칠원 본가 유적에 대한 해설을 해주신 주원식 선생님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