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친구 영희 – 문경자
문경자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 있는 집에서 잠이 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공원은 침침하고 어두웠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은 우울함이 몰려와 집안에서 혼자 지내기가 심심하던 참에, 문득 친구 영희를 찾아가 차 한잔 하고 오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변함없는 친구는 내가 살고 있는 신월동에서 30여분 떨어진 고강동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음을 정하자 나는 곧 출발하였다. 장미꽃이 그려진 가방 속에 한 권의 수필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노랑색 우산을 챙겨 들고서 나선 도로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씩 물이 줄줄 흐르는 포장마차나 누런 낙엽 빛깔의 목도리를 두른 할머니, 새로 짓는 재건축 공사장의 빨간색 벽돌과 비에 젖은 모래가 도로 변에 흩어져 있었다. 작은 연인들이 서로 마주보고 웃는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저 멀리 안개너머로 보이는 빨강색 벽돌로 지은 아담한 교회가 보이고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
버스를 타고 갈 때는 조용하여 책도 읽을 수 있었다. 밖에는 소나기가 퍼붓고 가로수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있었다. 비는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앞에 과일을 팔고 있는 노점상과 파리바게트, 신발가게도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북적거리는 골목시장이 나온다. 삶이 묻어나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약간의 언덕배기를 올라가면 아담한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주택 집 한 귀퉁이에 점집을 표시하는 붉은 천이 대나무에 달려 펄럭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아파트 정문을 통과하여 왼쪽으로 가서 비밀 번호를 꾹꾹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희가 살고 있는 6층에 내렸다. 벨을 눌렀다. 집안에서 걸어 나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 그 음성, 얼마나 그립던 목소리인가. 바로 문이 열리면서 활짝 웃는 영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니 기쁨이 몰려왔다.
아아, 명품가방을 들지 않고 밍크코트를 입지 않아도 부모님이 물려준 외모만으로도 예쁜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영희는 오직 한 사람, 지난 일요일에 내가 불쑥 찾아가서 만났던 그 사람뿐이다. 약간의 갈색 빛깔의 파마머리, 회색 털실로 짠 조끼를 입고 있던, 선한 눈빛과 차분한 충청도 말씨. 멋을 내지 않아도 귀티가 풍기는 그 자체만으로 내 맘을 끄는 영희.
“어서 와! 정말 오랜만이다!” 영희는 팔을 들어 올려 내 목을 끌어안고 큰 소리로 반겨주었다. “정말 잘 왔네. 마침 오늘은 외손자가 유치원에 가서 조금 늦게 오는 날이거든. 요즘 재롱잔치 한다고 집에서도 열심히 춤을 추는 모습도 보여주고 야단이야.”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벽걸이 시계가 걸린 넓은 거실을 들뜬 기분으로 둘러보았다.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와보지 못했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베란다에는 철 지난 분홍색 진달래꽃이 활짝 피었다. 작은 방을 둘러보니 딸의 결혼식 사진, 사진 속에 그는 웃고 있었다. 거실에 놓여있는 갈색 쇼파에 앉았다. 나는 가지고 간 수필집을 그에게 전하였다. 얼굴엔 함박웃음을 띄우고 기뻐하며 두 손으로 책을 맞잡았다. “그때 출판기념회에 참석을 못해서 미안하다.”며 끝말을 흐렸다. 나는 “괜찮아”하고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수필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7년 만에 출간된 내 첫 수필집이다. 한 편의 수필을 다듬는데 기울인 노력만큼 세상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 보고 좋은 글 한 줄이라도 기억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했다.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처럼 고달프게 매달린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좋아.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좋아’라고 대답한 사람을 잊지 말지어다.
그는 수필집을 손에 든 채 감격하며 책장을 넘겼다. 그때 베란다 창 밖에서 빠앙~ 하고 크락션 소리가 들려왔다. 외손자가 유치원에서 돌아왔다면서 스웨터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문을 열고 나갔다. 외손자는 아주 어릴 때 가끔씩 본 적이 있었다. 금방 아이의 발소리, 말소리가 들렸다. 씩씩하게 “안녕하세요” 배꼽인사를 하였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유치원에서 배운 무용을 보여 주었다. 그러는 동안 작은 곰 인형이 그려진 네모난 상에 푸짐하게 음식이 차려졌다. 아, 그것을 먹는 즐거움이라니! 알맞은 온도로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 푸른 상추 잎, 직접 만든 쌈장과 오이지, 동치미도 그 맛이 일품이었다. 외손자에게 맛있게 구운 삼겹살을 후후 불어서 먹여 주는가 하면 밥을 입 안에 떠 넣을 때도 같이 입을 벌리는 모습이었다.
조금 있다가 외손자는 집으로 데려다 주고 왔다. 내가 사가지고 간 맥주를 따랐다. 거품이 보글보글 만남을 축하하듯이 보였다. 그가 만든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만남을 위하여” 하고는 한 모금 먹었다. 술을 먹는 친구는 술 한 잔도 못하는 나와 잘 지낸다. 식사가 끝난 후에 책을 펼쳐 보였다. 나는 한 대목을 부드럽게 읽어 나갔다.
나는 그만 읽고 밖으로 나가 보자고 했다. 마침 재래시장은 세일을 하는 날이라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있었다. 세찬 바람은 구름을 밀어 가고 있었으며 비에 씻긴 길은 깨끗하게 보였다. 냉면집 간판이 달려 있는 집 앞을 지나 미장원을 끼고 우측으로 돌아 나왔다. 재래시장은 재미있는 볼거리가 많았다. 화장품 가게에서 비춰 나오는 빛과 햇빛이 바람에 물결치고 있었다. 옷을 파는 집에 들렀다. 회색 티를 하나 골랐다. 영희는 이런 색을 주로 입는데 나는 원색의 화려한 색을 좋아한다. 키가 보통이고, 말이 없고, 얼굴은 갸름하고, 그저 웃어 주는, 눈가에 새 발톱 주름, 그래요, 맞아요, 안 그래유 하는 영희는 작은 손짓과 눈빛만 보아도 알 수가 있는 내 친구다. 일곱 형제의 맏며느리, 시집식구들을 돌보며 시집, 장가까지 보내고 살아온 사연도 우리 둘은 똑같다. 둘이 있어도 할 이야기가 끝이 없는 것도 닮은 데가 없어도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신뢰로 묻어온 세월은 이렇게 많은 것을 쌓았다.
발이 나보다 작아서 오래 걷는 것은 무리였다. 오랜만에 왔으니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자는 말에 나는 얼씨구나 하고 팔짱을 끼고 돌아왔다. 큰 새우를 쪄내고, 시원한 된장국, 청양고추를 넣은 부추전, 새콤달콤 오이무침, 갈치조림, 볶음 멸치 등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손놀림은 종합예술이었다. 예술인의 손이다. 반찬을 담는 그릇 또한 예술이다. 도자기에 회색의 무늬는 주인의 취향에 딱 맞았다. 나는 붉은 장미가 그려진 커피잔이나 접시가 좋은데 반대다.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좋아하는, 한시도 잊지 않고 서로 다독여주고 미소로 답하는 바로 내 친구 영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