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힘은 야로 야철(冶鐵)에 있었다 (3)
“고령군은 본래 대가야국이다.······· 두 개의 현을 거느렸다. 야로현은 본래 적화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도 이를 그대로 쓴다. 신복현은 본래 가시혜현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나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高靈郡 本大加耶國 ······· 領縣二 冶爐縣 本赤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新復縣 本加尸兮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이 기록에 나오는 가시혜현(加尸兮縣=신복현)은 오늘날 고령군 우곡면에 위치하였고, 적화현(赤火縣=야로현)은 오늘날 합천군 야로면과 가야면에 해당된다. 이들은 본래 적화국(赤火國)과 가시혜국(加尸兮國)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다가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주군(州郡)과 속현(屬縣)은 통일신라에 의해 편제된 것이지만, 이러한 영속(領屬)관계는 이들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기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고령군과 두 개의 속현의 관계는 반로국을 중심으로 적화국과 가시혜국이 지역연맹체를 형성한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반로국이 지역연맹체를 형성한 시기가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삼국지』동이전에 반로국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늦어도 3세기중엽 경에 반로국은 적화국, 가시혜국 및 성주지역 세력들과 지역연맹체를 이루지 않았을까 한다. 이로써 반로국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헌이 거의 없는 제철지 야로의 역사를 추적하는 데 있어서는 적화국 야로와 흥망성쇠를 함께한 고령의 대가야 역사를 먼저 살펴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반로국에서 가야국으로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변한(弁韓)연맹체는 가야(加耶)사회로 전환하였다.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변한 12국은 여러가지 변화를 겪게 되었다. 12국 가운데 후대까지 남은 국들과 연결되지 않은 국들은 쇠퇴 내지 소멸되어간 세력이라 할 수 있고, 다라국(多羅國)처럼 변한 12국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국들은 새로이 두각을 나타낸 국이라고 할 수 있으며, 김해의 구야국(狗邪國)이나 함안의 안야국(安邪國)처럼 후대에도 이름이 나오고 있는 국들은 지속적으로 발전한 국(國)들이라 할 수 있다.
고령 반로국도 후대에까지 이름이 나오고 있으므로 지속적으로 성장한 나라라고 하겠다. 반로국이 이처럼 성장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수장 칭호의 변화와 국호의 개칭이다. 변한사회에서 국의 수장의 칭호는 신지(臣智), 험측(險側), 번예(樊穢), 살해(殺奚), 읍차(邑借) 등이었다. 이 가운데 신지는 대국(大國)의 수장으로 칭한 것이었다. 이 당시 반로국은 대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험측이나 살해 등을 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험측이나 살해 등은 『삼국지』‘동이전’에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이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집권력이 미약하여 읍락의 거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오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된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수장 칭호의 변화이다. 『일본서기』 신공기 62년(수정연대 382)에 인용된 백제기(百濟記)에는 ‘가라국왕기본한기(加羅國王己本旱岐)’라 하여 가라국의 최고지배자의 칭호로 ‘한기(旱岐)’가 나온다. 이는 4세기대의 가라국의 최고 지배자의 칭호가 한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장의 칭호 변화는 수장의 권력강화와 직결된다. 이렇게 볼 때 4세기에 와서 반로국 수장의 칭호가 종래의 번예나 험측에서 한기로 바뀌었다는 것은 수장의 권력이 그만큼 확대·강화된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제 반로국의 수장은 읍락의 독자성을 극복하여 통제권 하에 두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수정연대 369)에는 가라국(加羅國)이 비자목(比自炑), 남가라(南加羅), 훼(喙),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과 더불어 이른바 ‘가야 7국’의 하나로 나온다. 이 국명들은 52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양직공도(梁織貢圖)』의 ‘백제방소국(百濟傍小國)’으로 나오는 국명과 대비해보면 상당히 일치도가 높다. 이 7국 가운데 남가라(南加羅)는 김해의 금관가야를, 가라(加羅)는 고령의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남가라로 표현된 김해(金海)세력은 3세기 후반까진 구야국(狗邪國)이었으며 가야사회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가야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다. 맹주국이 된 이후 구야국(狗邪國)은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보듯이 임나가라(任那加羅)를 칭하였다. 임나(任那)의 ‘임(任)’을 ‘임금’의 뜻으로, ‘나(那)’는 ‘나라’의 뜻으로 보는 견해를 따른다면 임나가라는 가야제국(加耶諸國)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국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김해세력은 4세기중엽 경에는 당연히 임나가라로 표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 남가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은 백제적 시각이 투영된 결과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