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31) – 하재효
8.최치원 선생이 해인사에 남긴 흔적
(3)伽倻山 紅流洞 孤雲 제시석 처(題詩石 處)
해인사 홍류동에 위치한 ‘籠山亭’과 지척간(咫尺間) 거리에 비석 2기가 있다. 그 중 조금 먼 곳에 있는 1기가 [가야산 홍류동 고운 제시석 처]라고 이름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위치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야 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 비석은 마땅히 그 곳에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 비문 내용에서 밝히고 있다.
[고운 최선생은 신라가 낳은 天才的인 학자일 뿐 아니라 종교, 철학, 정치, 시문, 書道 등 각 분야에 걸쳐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이다. 선생은 12세에 입당 유학하고 28세에 귀국하였다. 22세인 황소난 때 병마도통인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지은 격문 중 불유천하지인(不唯天下之人)이 개사현육(皆思顯戮)이라 억역지중지귀(抑亦地中之鬼)도 기의엄주(己議陰誅)라는 구절은 황소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885년에 귀국하여 ‘侍讀兼兵部侍郞知書監’이 되었으나 국정의 문란과 간신들의 시기로 정읍, 함안, 서산 군수 등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894년에 ‘時務十條’의 개혁안을 올려 ‘阿湌’이 되었으나 ‘鷄林黃葉’의 비운을 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각지로 유랑하다가 가야산에 들어올 때는 확실하지 않으나 900년에 해인사 ‘善安住院壁記’를 지은 것은 입산 이전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선생이 가야산에 들어온 때는 37세인 894년에 ‘시무십조’를 올린 후 고려 태조의 재위년 중(918~943)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918년 이후에 입산하여 현재의 ‘孤雲庵‘터에 집을 짓고 살면서 ’武陵橋‘ 등 13명소를 정하여 명명하였고 자필로 그 이름을 새겼다.
그 중 가장 절경인 홍류동의 ‘籠山亭’ 동쪽 溪川中 巖盤에 그가 입산할 때 지은 (狂奔疊石….중략….故敎流水盡籠山)이라는 입산시를 새겼으니 ‘題詩石’이라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홍수광란(洪水狂瀾)으로 거의 마멸되고 起句인 ‘狂奔’ 2자와 結句인 ‘故敎’ 2자 등 4자만 희미하게 남아 있으므로 尤庵 宋時烈이 농산정 맞은 편 ‘文昌侯遺墟碑’ 북쪽 해인사로 올라가는 오른쪽 암벽에 자필로 이 시를 새겨 두었는데 孤雲眞蹟으로 잘못 알고 있으므로 記者가 본 위치를 찾아 희미하게 남아 있는 4자(사진)를 다시 深刻하고 후인들의 錯見을 없애고자 이 碑를 세워두는 바이다. 불기 2540년(1996) 3월10일 伽山 李智冠 記 中山 崔鐘相 書
*필자는 지난 호에서 ‘題詩石’ 詩를 ‘遯世詩(隱遯詩)’라 이름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