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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졌던 왕국 합천 “다라국(多羅國)” (2) – 이성동 논설위원

당시 발굴조사팀의 일원이었던 경상대 박물관팀은 1985년 여름,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옥전고분군을 확인하고, 그 이후 1985년 11월부터 1992년 2월까지 6년간 2차례의 시굴조사와 5차례의 발굴을 실시하여 대형 봉토분 9기와 목곽묘 62기, 수혈식석곽묘 44기 등 모두 115기의 유구를 확인하고, 그 이후 간행된 발굴조사 개보(槪報)와 10권의 보고서를 간행하기까지(1986~2003) 무려 1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6년 동안 이루어진 115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에서 토기와 비늘갑옷, 옥과 금동제 유물 등 2천여 점의 유물들을 수습했다. 발굴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량발굴이었던 옥전고분군, 당시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 했었고, 고고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김해 금관가야(金官伽倻金海)와 고령 대가야(大加耶) 사이에 홀연히 나타난 새로운 가야집단, 찬란한 문화와 막강한 세력을 간직한 채 천오백여년 만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쌍책면 성신리 일대의 옥전고분군의 유물들은 황강변 성산리 일대에 자리를 잡은 또 다른 가야집단이 5세기쯤에 남긴 문화유산이다. 지금 이 일대에는 1천여기 가야고분이 흩어져 있고, 덧널무덤으로 되어있는 23기의 고분에서 금제품과 금동제품·철제품·옥류·토기 등 5백21점이나 되는 새로운 양상의 가야문화를 대할 수 있었다.
현란한 금빛과 진녹색의 청동무늬가 어울린 금동관모와 미풍에도 하늘거릴 듯한 날개가 달린 세공의 금귀고리, 그것들에서 오늘날 사람들의 솜씨를 무색케 하는 가야장인(匠人)들의 손길을 볼 수 있다. 가야사람들은 무덤의 주인공들이 사용했을 비늘형태의 찰갑(刹甲)과 정강이 가리개(脛甲), 투구까지 묻어두었다. 그뿐이 아니라 말 주둥이에 물려주었던 말재갈과 말안장, 장식용 발거리 등 마구(馬具)도 무덤 주인공 곁에 놔두었다. 옥전고분군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까지 축조되면서 다양한 묘제와 유물들을 남겼다. 지금은 말끔히 복원된 고분군들, 그들의 정 중앙에 있는 것이 M3호분이다.
이 무덤이 특히 주목받는 까닭은 이 무덤에서 수습된 특별한 칼 때문이다. 다른 가야고분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용과 봉황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큰 칼이 한 무덤에서 넉자루나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이 고분의 피장자(彼葬者:무덤의 주인공)가 다른 어떤 가야소국의 지배자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가졌음을 웅변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다라국(多羅國)의 역사에서 가장 전성기를 누볐던 시기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도 다라국의 위상을 느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은 역시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換頭大刀)이다. 최고 지배자의 칼이었던 용봉문환두대도는 국내에서 모두 40여 점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의 도굴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고, 현재 학계에 보고된 것은 열여섯 자루에 불과하다. 그 중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이 일곱 자루이다. 독자적으로 왕의 칼을 가졌다고 보는 옥전고분군, 이곳은 독립적인 정치집단이 있었다. 즉 또 하나의 가야왕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그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4세기에 들어서는 수로(水路)를 통해서 김해·부산 지역의 선진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도질토기(陶質土器)가 49, 52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황강 주변의 조그마한 평지를 이용하여 곡물을 경작하거나 황강의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생활했을 뿐 어떠한 정치체의 형성은 없었음이 분명하다. 고고자료를 보면 이러한 생활은 4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세기 이후가 되면 상황은 일변한다. 즉 유구의 규모는 엄청나게 커지고, 여기에 부장된 유물 역시 앞 시기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굽다리접시 등 새로운 토기들과, 갑주를 비롯한 무기와 마구, 장신구 등의 금속유물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는 23호분의 유물들, 이 유물들을 사용했던 주인공들은 어디서 왔을까? 김해(대성동고분군), 부산지역(복천동고분군)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에서 옥전 23호분과 닮은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받침대에 낸 창까지 같은 모양이다. 접시 역시 섞어 놓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말 투구 역시 닮은꼴이다. 철판 갑옷과 철제 투구는 한 사람이 사용한 것처럼 똑같은 모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