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32) – 하재효 논설위원
8. 최치원 선생이 해인사에 남긴 흔적
(4) 고운(孤雲) 선생이 짓고 우암(尤庵) 선생이 암벽에 새긴 둔세시(遯世詩)
고운 최치원 선생이 A.D 898년경 농산정 부근의 암반에 남긴 시가 있다. 그 시의 내용은 같으면서 제목은 다양하다. ‘가야산 농산정시’, ‘둔세시’, ‘은둔시’, ‘입산시’, ‘가야산 독서당’, ‘가야산 홍류동’ 등이다. 이처럼 다양한 이유는 암반이나 문헌 등의 원문에서 제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운 선생이 직접 새긴 석각(石刻)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바람에 마멸되어 흔적이 묘연(渺然)하자, 그 내용의 원문을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한 선각자들이 많은데 먼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에 대하여 알아본다.
최고운의 시인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유수진농산(故敎流水盡聾山)’이란 28자를 자필로 써서, 홍류동 계천 분옥폭하방석면에 새긴 것인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매년 장마철 홍수의 광난으로 탕마(盪磨)되어 글자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자필로 이 시를 써서 홍류동 농산정 건너편 도로변 암벽에 새긴 것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두인(頭印) 자리에는 이증원(李增元) 및 이시원(李時원), 낙관(落款) 자리에는 우암서(尤庵書)라고 새겨져 있다.
정구(鄭逑, 1543~1620)의 한강문집(寒岡文集) 권9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고운시 1절이 폭방석면(瀑傍石面)에 각(刻)했었는데, 매년 임장광란(霖張狂瀾)으로 탕마(盪磨)되어 마멸(磨滅)되었고, 겨우 일양자(一兩字)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선조의 손자인 이오(李午, 1637~1693)가 탁집한 대동금석서첩(大東金石書帖)에는 광분고교 등 4자만 남아있는 것을 탁본하여 실었고,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의 산중일기에도 자획만멸(字畫漫滅)하여 즉 ‘광분고교’ 넉자만이 완전하니 진고운수적운운(眞孤雲手蹟云云)하였으며, 그 후 신필청(申必淸, 1647~1710)의 죽헌집(竹軒集) 권7, 정식(鄭栻, 1683~1746)의 명암집(明庵集) 권5, 송병준(宋秉畯, 1836~1905)의 연제집(淵齊集) 권21, 조근우(趙根遇)의 손암집(損庵集) 권4 등의 유가산록에서도 모두 한결같이 유수의 마찰로 자양(字樣)이 완마(刓磨)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출처 : 지관스님의 ‘해인사지’
(5) 고운이 자필로 石刻한 둔세시 넉자를 심각(深刻)한 이지관(李智冠) 스님
가산 이지관(伽山 李智冠) 스님은 고운의 둔세시(遯世詩)가 마멸되어 겨우 넉자만이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그 넉자 부분을 깊이 새겨 원형을 보존하게 되었다. 동시에 ‘제시석처(題詩石處)’란 비문을 새겨(1996.3.10 : 불기 2540년) 후인들의 착견(錯見)을 없애게 하였다.
지관스님은 1932년(壬申) 음 5월 11일 경북 영일군 류계리에서 경주 이규백(慶州李圭白)공과 김령 김선이(金寜金先伊) 여사의 3남3녀 중 2남으로 탄생하다. 17세에 해인사로 입산 출가하다. 32세부터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문헌을 남겼으며, 41세에 동국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55세에 동국대학교 제11대 총장 역임, 62세에 해인사 주지에 재임, 74세에 제32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다. 2012년 1월 2일(81세, 법랍 66년)에 타계하시고 해인사에서 종단장으로 영결식(1월 6일)이 거행되다. 2017년 5월 18일 해인사 홍제암(종성 원감스님) 평원에 지관스님의 사리탑비 설치작업이 성료되다. 지관대종사(智冠大宗師)님은 타계전 아래와 같은 말씀을 남겼다.
사세(辭世)를 앞두고
무상한 육신으로 연꽃을 사바에 피우고 / 허깨비 빈 몸으로 법신을 적멸에 드러내네 / 팔십 년 전에는 그가 바로 나이더니 /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바로 그이로다.
불기 2555년(2011년) 9월, 智冠 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