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황강 – 이호석 논설위원
가을로 들어 선지가 어제 같은데 벌써 입동, 대설이 지났다. 절기를 떠나 12월에 들어서니 겨울이 성큼 집안까지 온 것 같다. 가을부터 시작한 가뭄이 달포 넘게 이어지면서 온 대지가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어제 저녁, 예보에서 밤새 비가 온다기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기대를 하며 창문을 열어본다. 비 내린 흔적은 전혀 없고 구름만 짙게 낀 채, 제법 쌀쌀한 날씨가 문밖에서 나를 기다린다. 일곱 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주위가 어두워 선 듯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귀 덮개 달린 겨울모자에 마스크, 장갑으로 무장하고 아침 운동 길에 나섰다. 매일 아침 운동을 가는 곳은 마을 앞 황강변의 ‘체육공원’이다.
들길을 조금 지나 작은 고개를 넘어 체육공원에 닿았다. 얼마 전만 해도 아침 운동을 나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 겨우 영하 2~3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사람들의 발길이 확연히 줄었다. 여름엔 더위를 피해 도망 다니고, 봄가을이면 따뜻하고 시원한 날씨에 흠뻑 빠져 하던 일을 팽개치고 꽃과 단풍을 찾아 곳곳을 헤매더니, 겨우 영도를 조금 밑도는 날씨에 굴속에서 동면하는 곰들처럼 움츠러드는 인간의 간사스러운 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합천 천(川)을 사이에 둔 ‘핫들 생태공원’ 발치에 조성된 꽃 재배 단지에는 청보리와 유채가 차가운 강바람에 연초록 잎이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다. 넓은 황강 주위가 온통 희뿌연 물안개로 뒤덮였다. 100m 앞이 겨우 보일락 말락 짙게 깔린 상큼한 물안개가 비단결처럼 보드라운 감을 준다. 가까이 다가가 똑똑히 보려고 해도, 만지려고 해도 뚜렷한 실체가 없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오직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또 하나의 예술이다.
잘 가꾸어진 자전거 길을 따라 강물 가까이를 걷는다. 하늘에는 벌써 새벽잠에서 깬 철새들이 크고 작은 무리를 지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나른다. 어떤 무리는 남쪽으로, 어떤 무리는 동남쪽으로, 각자 찾아가는 목적지가 다른 모양이다.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날아가는 무리를 쳐다보며, 새삼 신비로움에 다시 한번 빠져든다. 그렇게 많은 놈이 제멋대로 날아가는데도 급발진이나 충돌사고가 전혀 없다. 인간들이 만든 내비게이션보다 더 정밀한 것을 달고 다니나 보다. 갈대가 엉기성기 서 있는 강 언저리에는 오늘따라 청둥오리와 함께 이름 모를 철새들이 떼거리로 놀고 있다. 갈대숲 주위에는 얇은 은빛 얼음이 곳곳에 엉켜있다. 차가운 물속에서도 발도 시리지 않은지, 신나게 떠돌아다닌다. 마치 따뜻한 안방에서 아이들이 뛰놀듯 즐겁게 놀고 있다.
겨울이 막 시작되는데, 벌써 티브이에서는 어느 지역에서 조류독감이 발병되었고, 전염을 우려해서 인근 지역의 가금류를 수백 마리 매몰했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하늘을 훨훨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철새들이 마냥 평화로워 보였고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만 보이질 않는다. 저렇게 넓은 하늘을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날아다니며 조류독감을 퍼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놈들은 세계 어느 지역을 가도 무여권, 무비자 특권을 가진 놈들이다. 누가 무슨 재주로 통행을 제한할 수 있겠는가. 저놈들 때문에 올겨울도 가축을 기르는 전국의 많은 농민이 애태울 것이다. 또 전국 곳곳에서 우리에 갇혀 자유가 속박된 채 인간에 의해 희생되고 있는 가금류들이 얼마나 많이 억울한 주검을 당할까. 천지를 날아다니며,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저놈들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생매장당하는 가금류들의 가엾은 모습과 그들을 산 채로 묻고 있는 인간들의 잔혹함을 생각해 본다.
강물은 오늘도 유유히 흐른다. 태곳적부터 흐르는 저 강물은 아직 한 번도 끊이지 않고 흐르면서 주변의 인간과 생태계에 생명의 근원이 돼 주고 있다. 주변의 자연을 어루만지며 유유자적 흘러간다. 가다가 강 곳곳에 쌓인 모래톱 숲을 만나면 아무 불평 없이 갈라섰다가 그곳을 지나면 다시 만나 사이좋게 흐른다. 어떠한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아도 성내는 일 없이 인내하며 둘러가고, 넘어간다. 또 아무리 오염된 물이 들어와도 절대 배척하지 않고, 안아주고 아픔을 함께하며 흘러간다. 강물! 그대는 진정 신성(神聖)인가 보다!
강가의 수양버들은 푸른 옷을 홀랑 벗고 알몸을 들어낸 채 새벽의 찬 이슬에 목욕을 하고 있다. 한때 곱고 하얀 털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던 갈꽃은 어느새 잎들과 함께 누렇게 변해 염색이 바랜 노인의 머리처럼 엉성하게 서 있고, 잘 다듬어진 자전거 길옆으로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푸른 여름 정장을 벗고, 황갈색 가을 옷으로 산뜻하게 갈아입고 또 다른 멋을 내고 있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서 제멋을 자랑하던 온갖 잡초들도 어느새 검붉은 겨울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봄이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나는 그 속을 걸으면서 너무나도 빨리 지나간 정유년 한해를 아쉬워하면서도, 벌써 다가올 새봄과 그 뒤 여름의 황강 모습까지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