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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찬의 먼 북소리(7) 16년, ‘인생1막’의 기간일까? – 최효찬 작가, 수필가. 문학박사

오후에 제법 굵은 비가 내렸다. 빗물 동판은 이내 후드득 빗소리로 요란하게 울렸다. 문득 가야산 홍류동 농산정의 세찬 물소리가 떠올랐다. 2023년 7월 이맘때쯤 대구 경운재(慶雲齋)에서 열린 종친회 임시 이사회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오후에 고향 집으로 가다 잠시 해인사로 향했다. 가야산 소리길을 홀로 걷고 싶었다. 대장경 테마파크 주차장에 주차하고 걷기 시작했다. 30분쯤 걷는데 부슬부슬 비가 오더니 제법 빗방울이 굵어졌다. 혼자 걷게 되면 온전히 걷는데 집중할 수 있다. 물소리 산새 소리에 잠시 발길을 멈추기도 하고 이정표에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하기도 한다. 청량사(淸凉寺) 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청량사는 고운 최치원(857~?)이 노닐었던 곳 중의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그날따라 고운 선생의 발자취가 마음에 머물러 걷는 내내 나비처럼 따라다녔다.
“제가 부모와 이별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저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지금 이미 16년이 되었습니다. 장한(張翰)의 가을바람을 읊조려 보니 돌연 돌아갈 생각이 솟구치고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까닭에 뱃길은 더욱 멉니다.” 이 글은 고운 선생이 884년 가을에 고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 상관인 고병에게 쓴 ‘사허귀근계’(謝許歸覲啓), 즉 ‘귀국을 허락하신 데 감사드리는 계문’에 나온다. 이 대목을 접하고선 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고운 선생은 왜 관직을 그만두고 귀국을 결심했을까.
“11년 봄 2월, 호랑이가 대궐 안에 들어왔다. 3월, 최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일,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 사신을 당에 보내 반적 황소를 쳐부순 것을 치하하였다.” <삼국사기>에는 885년 헌강왕 11년에 일어난 세 가지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당시 고운의 귀국이 얼마나 화제였는가를 알 수 있다. 최치원은 조기 유학에 성공해 금의환향한 인재였다. 그가 쓴 격문으로 황소의 반란이 진압되었는데 삼국사기에 공교롭게도 고운의 귀국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 토황소격문으로 문장가로 이름을 얻었다. 나름 성공한 인생1막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가 동쪽 ‘군자국’이라고 칭할 만큼 자부심을 주었던 고국의 운명은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894년 2월에 시무 10여 조를 올리지만 시행되지 못하자 898년 11월에 아찬 직을 그만두었다. 선생이 마흔두 살 되던 해이다. 고국에서 뜻을 펼쳐보려던 그의 인생2막은 속절없이 꺾이고 말았다. 900년, 마흔네 살의 고운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화엄종의 승려인 동생 현준(賢俊)이 있는 해인사에 은거를 시작했다. 그가 귀국한지 16년째 되던 해이다. 선생의 마지막 인생3막은 베일에 싸여 있다.
소리길을 빗속에 걷다 보니 천여 년 전 은자의 발길을 따라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홍류동 계곡에 이르자 비가 그쳤다. 개울물은 거세게 흘렀다. 농산정을 바라보는데 마치 은자의 못다 이룬 꿈이 세찬 물소리에 메아리치고 있는 듯했다.
그날 소리길을 걸으면서 고운의 당 체류 기간과 귀국 후 은둔하기까지의 기간이 ‘16년’이라는데 마음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16년’은 말하자면 고운 선생의 인생1막의 기간이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인생1막 기간도 16년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 2월에 신문기자를 시작했는데 2006년 4월에 퇴사했다. 도중에 6개월 정도 쉬었다. 16년 정도 신문기자를 하다 보니 사회는 급변해 신문기자가 광고 영업사원 취급 받는 세상이 되고 있었다. 이는 신문기자 전성시대가 끝나는 징후였다. 마흔세 살의 젊은(?) 날에 작가의 길로 겁 없이 뛰어들었다. 서른 권 넘는 책을 출간하다 보니 16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또 묘하게도 책의 전성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유튜브가 블랙홀이 되어 세상은 책의 종언을 고ᆢ하고 있었다. 작가의 대우가 예전같지 않았다. 소리길을 걷고 있던 지난 2023년 여름은 작가의 길을 걸은 지 16년이 지나가던 때였다. 말하자면 인생2막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법정 스님이 1975년 불일암을 직접 지어 기거하기 시작해 머문 기간이 17년이었다. 이어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강원 산골로 떠났다. 여기서 17년 동안 은둔하다 2010년 돌아가셨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어떤 일도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스님은 불일암을 떠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산은 시들지 않는 영원한 품이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시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들어가는 것은 비단 육신뿐만 아니다.
동양의학에 따르면 신장의 발달 주기가 남자는 8년 여자는 7년으로 본다. 신장은 인체의 선천적인 에너지(원기)를 저장하고 생명 활력의 근원을 주관하는 장기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최소 8년, 최대 16년의 기간이 인생1막에 해당하지 않을는지. 그 시기가 지나면 활력도 에너지도 관심의 집중도도 시들해진다는 원리가 아닐는지. 그래서 고운은 당에서 16년을 보내고 문득 뒤돌아보니 당에서 이루고자 한 자신의 꿈이 시들해짐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 잠이 들었다. 새벽에 세찬 비가 내렸다. 고운 선생의 가야산 뜰에 내렸던 그 장맛비가 인생3막의 뜰에도 내리고 있었다. 거인의 발자취에서 유한한 인생의 시간을 생각한다. 인생에서 다음 무대는 기약되어 있지 않다. 다만 지금의 인생3막도 늘 푸른 마음이 함께 하며 ‘16년 동안’ 잘 열매맺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