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판제 이사장, ‘파워코리아(PowerKorea)’ 표지인물 선정<1>
합천 대병 출신의 (재)지봉장학회 박판제 이사장이 월간 ‘파워코리아(PowerKorea)’ 잡지에 올해 2월의 표지인물로 선정되어 화제다.
파워코리아는 환경청장과 국제디자인대학원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박판제 이사장이 우리가 세계의 문을 두드리고자 호흡을 가다듬던 70~90년대, 그 변화의 중심에서 재정경제개혁과 환경문제 해결사를 자처하며 대한민국의 도약을 이끌었던 그의 활약상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박 이사장의 일대기를 스페셜 인터뷰로 다룬 파워코리아는 그를 일러 “거침없는 발상의 대전환으로 대한민국의 과거와 미래를 디자인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본지는 파워코리아에서 재조명한 박판제 이사장의 일대기와 그의 역사관, 철학 등을 요약하여 2부로 나눠 소개하고, 오는 19일(토) 합천을 방문하여 (재)지봉장학회 장학금 수여식에 참석할 그를 직접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2010년 창간된 뉴스앤매거진 파워코리아는 ‘대한민국을 강하게 하는 힘’을 표방하며, 국내외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국내 대표 국·영문 시사 월간경제지다. 월간파워코리아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별 주요 이슈를 분석하고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기관·인물/브랜드를 찾아 국내외의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하는 고품격 국·영문 월간지로 파워코리아 CEO&GLOBAL, 파워코리아 BRAND 두 권의 책이 매달 발간된다. /이용석 기자

하늘이 예비한 대망의 길을 걷다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박판제 이사장의 6대조는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던 인물이며, 고조부는 500여석 명망 있는 지주였다. 그의 조부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떠받치고자 구한말 세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만다.
뜻을 펼치지 못한 조부는 불의와 타협하는 대신 동학의 의병장이 되었고, 하동전투에서 31세로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이후 크게 가세가 기운 가운데, 중학교 진학마저도 어려워진 박 이사장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만류를 뒤로 하고 상경하게 된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불량배들에게 여비를 모두 털려버리고, 예정했던 사환자리 취직마저 불가능해진 그는 우연한 기회로 남산직업소년학교를 소개받을 수 있었고, 낮에는 구두를 닦고 밤에는 야간중학과정을 공부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중 2학년 가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게된 고향 선배의 소개로 공군인쇄소 서울연락사무소 사환으로 취직하게된 행운을 잡았지만, 열악한 환경과 고된 생활 속에 폐결핵을 앓기도 했던 박 이사장, 그러나 8개월여 만에 기적처럼 완치될 수 있었고, 야간고의 명문이었던 덕수상고에 진학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1년 뒤 서울사무소의 소장이 사임하게되자 소장대행의 기회를 얻기도 했으나, 얼마 안 가 연락소가 폐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공군인쇄소 간부들의 배려로 졸업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연락소가 유지되 게되었고, 그 기회를 잘 활용하여 열심히 공부한 결과 그는 고려대학교 상대에 합격하게 된다. 그 겨울, 유난히 푸른 하늘이 빛났던 이 날이 바로 이후 대한민국 재정과 경제개혁을 이끌 한 인물의 출발점이었다.
창의력으로 일궈낸 혁신의 발판
1970년대 초, 청와대 부실기업정리 총괄반장으로 부임한 그는 2년여 동안 55개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철강, 자동차, 조선, P.V.C, 수산업 등의 업종에 대해 통폐합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철강공업육성법, 자동차공업육성법, 섬유공업육성법 등을 제정케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산업 구조조정을 단행, 경제발전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재무부 증권과장 시절에는 49개의 증권시장 상장사를 400여개로 확대했으며,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던 명동의 증권시장을 오늘의 여의도로 이전하는 등 증권시장 발전에 기여했다. 국보위 재무분과위원 시절 박 이사장은 ‘9.27 기업체질강화대책’을 발표해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과 방대한 계열기업을 대폭 정리케 하여 주력 기업을 적극 육성토록 하고, 주식회사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을 제정케함으로써 공인회계사에 의한 외부감사제를 최초로 도입하게 했다.
박판제 이사장의 활약은 청와대 대통령 사정비서관 시절로 이어진다. 그는 청탁배격운동과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했으며, 부정선거는 정권의 존망을 담보한다는 역사적 경험을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공명선거 정착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실제로 1950년 48개 정당의 난립과 과열선거는 6.25의 참상을 불러왔으며, 관권 부정선거는 4.19 자유당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공화당 말기 ‘5당4락’이라는 말을 낳기도 했던 금권선거는 10.26 공화당 정권 붕괴로 이어진 바 있다. 집권당 후보의 구속조차도 서슴지 않는 그의 개혁 의지는 공명선거의 정착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부정선거가 엄두도 낼 수 없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는 환경이다”
자리에 개연치 않고 발휘된 그의 능력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부상한다. 세계 언론이 주목한 대한민국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임자로 지목된 것이다. 그가 환경청장으로 부임한 당시는 급속한 경제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아직까지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주목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를 즈음하여 북한에서는 서울의 공해문제를 전 세계에 선전하고 있었고, 국내에서도 운동권 인사들에 의해 공해상황이 지속적으로 고발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서해지역 산성비 측정치가 신문에 보도되며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박 이사장은 국무회의에서 “제가 입만 열게 해준다면 적극적 홍보 계도를 통해 돈 한 푼 안 들이고 환경오염의 60~70%를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절절한 심정으로 호소한다. 그의 말을 들은 당시 노신영 총리는 “청장이 힘이 모자란다니 우리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해봅시다”라고 지원을 약속했고,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이후 박 이사장은 ‘더 맑게, 더 푸르게’를 청훈 겸 환경표어로 삼고 전 국민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 전환을 이끌어냈으며, 본청 국을 신설하고 6개 지방청과 환경관리공단, 팔당 임호연구소 등 조직을 대폭 정비하여 환경행정의 추진 체계를 확립한다. 특히 ‘무연 휘발유’와 ‘저공해 자동차 생산보급’은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정책이었다.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자동차제작 3사의 저항과 집요한 로비는 물론, 짧은 준비기간과 막대한 준비소요 비용 등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던 그였으나, 단호하고도 강인한 추진력으로 이를 달성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저공해자동차 시대를 열게 된다. 또한 당시 내수차와 수출차를 차등을 두고 있던 것을 동일 기준으로 하게 하고, 미국차량 수준에 맞춰 생산하도록 함으로써 장차 대두될 환경오염과 수출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기도 했다. 박 이사장은 향후 100년이상 사용 가능한 650만평에 달하는 김포 쓰레기매립장을 확보함과 동시에 장차 통일에 대비하여 영종도, 강화도, 진도, 율도 등 4개 도서를 연결하여 향후 300년 이상 반 영구적으로 사용가능한 수도권 쓰레기매립장을 확보함으로써 국내 환경정책 발전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았으며, 이러한 공로로 ‘20세기를 빛낸 환경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