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幻想)의 사슬 – 문계성 수필가
진정한 위대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당신이 자유로운 개인으로 깨어나 마음껏 자유를 향유하는 것일 것이다. 왜 삶이란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 졌을까? 당신은 왜 남과 다른 당신일까? 당신은 남과 다른 개별적인 삶을 경험하기 위하여, 하필 당신으로 태어나 남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당신에게 주어진 그 개별성이야 말로, 신(神)이 당신으로 응신(應身)하여 삶을 누리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전체주의를 경멸한다. 전체주의는 하나의 관념으로 통제되는 체제를 요구한다. 그래서 개인의 사상적 자유는 제한당하거나 박탈당한다. 개인이 독자적 사상을 상실할 때, 독보적 개체가 아닌 누군가의 추종자나 부속물로 전락한다.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독재자란 누구일까? 자기의 사상이, 자기의 판단이 가장 옳다는, 즉 자신이 가장 정의롭다는 독단에 빠진 자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정의를 남에게 강제한다. 그는, 그의 생각과 다른 생각들에 대하여 대의(大儀)를 모르는 이기적 적폐라고 공격한다. 그래서 독재자는 지독한 자기애(自己愛)에 빠진 사람이다. 어떻게 자기의 생각이 남보다 전적으로 더 옳을 수 있을까? 사상이 전적으로 선험적 진리라면 아마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 사상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던 개인 경험의 산물이다. 위대한 사상이란 아마, 경험자 대다수가 동의 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구현되는 사상일 것이다.
세상의 독재자들은 매우 특별한 가치를 강조한다. 이제까지 인류가 한 번도 실현해본 적이 없는 특별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히틀러의 말을 들어보라. 그는 자신이 가장 민주적인 바이마르 헌법에 의하여 선택된 자이며, 게르만 종족을 위무하여 다시 일어서게 한 영도자이며, 그 만이, 1차 대전의 패배로 고통 받는 게르만의 독일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웅이었다. 그는 민주적 절차로 선택되었으므로, 하물며 그가 일으킨 전쟁조차 정의로웠다. 그를 숭배하여 그의 독단에 함께 빠진 자들 까지도 그의 정의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의 전쟁은 정의로웠던가? 그가 일으킨 학살은 어떤가? 그러나 그는 정의로웠다고 말할 것이다. 그는 그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말로, 그가 정의로웠다는 항변을, 아마 몇 시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백 만 명을 학살한 그가, 조국 독일을 전범 국가로 만든 그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을 수 있을까. 그는 자기애에 빠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의 인구 600만 명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학살한, 그것도 아직 정의를 구분할 삶의 경험조차 없는 어린 아이들의 손에 피를 묻혀가며 저지런 폴포트와 키우삼판은 어떤가. 그들에게 물어보라. 캄보디아의 기름진 들판을 죽음의 들판으로 만든 그들에게 ‘당신들의 전쟁은 정의로웠던가?’ 물어보라. 그들은 아주 논리적으로 그들의 정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관념을 무엇 보다 사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수 백 만 명의 목숨 보다 자기 사상을 더 사랑한, 자기애에 빠졌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이런 미친 자기애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생명 보다 사상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자기애에 빠진 사람들이 신념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것이 혁명이다. 그래서 혁명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사람을 학살한다. 혁명의 이름은 학살을 정당화한다. 이제는 쓰러져 퇴물이 되어버린 관념으로 국가를 만들었던 스탈린을 보라. 그는 혁명의 이름으로 수 천 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의 혁명 과제는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끝났다. 만약 그의 관념이 인류의 삶에 부합하는 것이었다면, 그의 혁명은 그의 후대에 의하여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포섭한 사상이 많은 관념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관념이 아닌 진리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난 진리를 머리에 이고, 그 관념의 제단에 인민을 제물로 바쳐서 피를 뿌린다. 그들은, 그 광란의 춤을 아름답다고 추겨 세우며 그 춤은 영구적으로 계속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관념은 사고(思考)에 따라 바뀌는 환상(幻想)이다. 그래서 영구적 생명을 가진 관념은 없다.
그러나 아직 혁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안전한 직장에서 고액의 돈을 받으며, 혹은 이불 속에서 책을 읽으며, 혹은 연금을 받고 여행을 즐기며, 혹은 자유연애를 즐기면서 ‘쌰르트르’ 처럼 노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외치며 혁명을 꿈꾼다. 다시 ‘레닌’의 혁명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정의다. 이를 강제할 때 그것은 가장 무지한 폭력이 된다. 내가 위대한 개체(個體)라면, 당신 역시 위대한 개체로서 완전한 존재다. 나와 당신이 평등한 것은, 가진 소유물이 평등하여 평등한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서 이미 평등한 것이다.
어떤 정치인들은 사회적 불평등에 집착한다. 그래서 남의 부(富) 빼았아 나누어 주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사회적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지 강제된 부의 나눔이 아니다. 강제된 부의 나눔이 평등이라는 관념의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먼저 사람의 관념을 지배하려 든다. 필연적으로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체주의자들은 권력을 나누지 않는다. 국가 권력을 일당(一黨)이, 혹은 개인이 몰수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신념에 배반되게도 시장경제를 선호한다. 그들의 ‘평등 사회’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가 사람이 추구하는 인류 보편적 삶의 형태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실험은 ‘행복한 삶’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더 철저한 계급사회로 회귀시켰으며, 기회의 균등마저 파괴했다. 지금의 우리 정부가 부르짖는 평등은 어떤가? 개인과 기업의 돈으로 만들어진 국민연금으로 국가가 사기업의 경영권을 공격한 것은 어떤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였는가? 그것도 정의인가? 전체주의 체제의 모순과 오류, 그리고 위선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는가?
중생(衆生)은 환상을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만들어준, 혹은 스스로가 만든 관념의 사슬에 매여 관념의 주재자(主宰者)가 아닌 관념의 추종자로 산다. 우리가 관념을 만들어 내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념이 아닌 실용성을 숭배하며, 비판적 독존(獨存)으로서 삶의 주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