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뉴스홈

|연재|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 (44) – 하재효 논설위원

해인사 고운 최치원 선생 유적

  1. 최치원 선생의 어린시절 (홍류동 문창후 고운선생 신도비명에서)
    (1) A.D 857년(신라 헌안왕 원년), 지금의 서라벌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2) A.D 860년(4세), 선생의 풍의(風儀)가 아름답고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좋아하였다.
    (3) A.D 866년(10세),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었다” 는 기록이 전할 정도로 신동(神童) 이었다.
    (4) A.D 867년(11세),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인 이벌찬의 다른 이름) 나천엽의 딸 나운영과 혼인하다.
    (5) A.D 868년(12세, 신라 경문왕 8년), 관비로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하 니 그의 아버지께서 “10년 공부하여 과거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그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하였다.

<선생의 어린 시절에 대한 필자의 소고(小考)>
위 (1)항에서 선생의 출생 연대가 “신라 47대 헌안왕 원년” 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에 의하면 “46대 문성왕 19년, 정축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 이는 같은 해에 왕위가 승계될 수 있으므로 홍류동의 ‘문창후 신도비명’을 존중하여 근거로 삼았으며, 출생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 46, 열전’에서 사전(史傳)이 인멸되어 그 세계(世系)를 알지 못한다.”
삼국유사에서 “최치원은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 황룡사(皇龍寺) 남쪽 매탄사(昧呑寺) 남쪽에 옛집이 있다하니 이것이 최후(崔侯)의 옛 집이 분명하다.” 위(2~5항)에서 4세에 글자를 익히고, 10세에 ‘사서삼경’을 읽었다는 부분에 대하여, 그것이 가능할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찾던 중 천자문에서 ‘외수부훈(外受傅訓)’ 이란 뜻인 즉, ‘여덟살이 되면 밖의 스승에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는 고사성어(故事成語)를 만나게 되었다. 고운은 타고난 재능(才能)을 어려서부터 살려나갓으며, 훌륭한 말씀을 몸에 익혀, 가족을 떠나 독립할 수 있는 용기와 품성을 갖추게 됨은 놀라운 일이고, 이에 앞서 보여준 부모의 결단력이 1,1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위 (4)항에서 11세에 혼인함은 먼 길 떠남을 예상한 부모의 의도가 예상되지만 오늘날(조선시대~ )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 60세를 살기가 어려웠으므로 살아 후손을 보기 위하여 결혼 연령을 당겼으리라 추정된다. 문화사적으로 살펴볼 때 신라의 전성기에는 서라벌에 ‘수십만호가 살고,기와집이며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가 없었다.’고 배운적이 있다.

고운의 시 “접시꽃” 고운 최치원 선생 문집에서(최영성 역주)
거친 밭 언덕 적막한 곳에
/ 탐스런 꽃송이가 약한 가지 누르고 있네

매우(梅雨)가 그칠 무렵 향기도 가벼워라
/ 보리 바람에 기울어 그림자 흔들리네

수레 탄 사람 누가 보아주리
/ 그저 벌 나비만 와서 엿볼 뿐일세

생지(生地)가 천한 것 스스로 부끄러워
/ 사람들에게 버림받아도 참고 견디네

*필자가 이미 비슷한 내용을 연재하였으나 최근 고운 최치원 선생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합천군 주최, 경남대 고운학 연구소 주관, 19.05.08)’가 열리는 등 합천군의 관심사로 재조명됨에,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조금씩 가미하여 재 연재함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