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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운잡기| 남명(南冥) 선생의 경의검(敬義劍)과 성성자(惺惺子) – 권해조 논설위원

며칠 전 고향 합천 삼가에 있는 남명 선생 생가지(生家地)와 산청 시천면에 있는 남명 선생 사적지(史蹟地)를 방문했다.
남명 조 식(曺植: 1501~1572) 선생은 합천 삼가면 토동(兎洞: 현 외토리)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를 지낸 부친 언형(彦亨)과 모친 인천 이씨(李氏)의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5세 때 벼슬길에 오른 부친의 임지를 따라 한양에서 성장하며 학문을 배웠으며,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과 정치의 폐단을 목격했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선생은 벼슬길을 접고 오로지 산림에 은거하며 성현들의 학문에 전념하면서 스스로 호를 남명(南冥)이라 하였다. 4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고향 삼가 토동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鷄伏堂)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이때 선생은 사림(士林)의 영수로 나라에서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기질 않았다. 55세 때는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명종에 올려 조정을 격동시키고 사림의 기개를 높였다. 그는 상소문에서 나라가 부패하여 민심은 흩어지고, 빈번한 왜국의 침략으로 성은 쉽게 무너지고 유능한 장수와 쓸모 있는 군졸하나 없다며, 허술한 국방정책의 강화를 충언했다.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인 고사(孤嗣)로 표현하고, “천 가지 백 가지 천재(天災)와 억만 개의 민심을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라고 직언하면서 당시 정치와 사회의 위기의식을 과감히 지적했다. 61세에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산청 덕산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72세에 운명하였다. 선생은 사후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필자는 먼저 선생의 합천 생가지역을 방문하여 뇌룡정(雷龍亭), 용암서원(龍巖書院), 그리고 남명교육관을 둘러보았다. 토동(兎洞) 생가(生家)는 1970년도 새마을 사업으로 철거되었으며 현재 안채, 사랑채, 대문채 등이 복원 중이었다. 뇌룡정은 남명 선생이 4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함께 지어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1900년대 초에 허 유(許 愈) 등에 의해 중건되었다. 뇌룡정이란 장자(莊子)에 나오는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되면 용처럼 나타나고(尸居而龍見),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淵黙而雷聲)’라는 뜻이다. 용암서원(龍巖書院)은 1576년 노 흠(盧 欽) 등 제자들이 남명 선생의 제향(祭享)을 위해 인근 회현(晦峴: 가회면 장대리)에 세운 회산서원(晦山書院)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5년 봉산면 봉계리로 옮겼으며, 1609년 광해군 때 용암(龍巖)으로 사액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기되었다가 2007년 뇌룡정 옆에 복원되었다. 남명교육관은 남명 선생의 경의사상(敬義思想)과 선비정신을 후세에 전승시키고자 2016년 12월에 준공하였다. 교육관 앞에는 선생의 흉상(胸像)과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 선생의 생가지는 경상남도 시도기념물로 지정돼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다음은 산청 남명 선생 사적지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산천재(山天齋), 덕천서원(德川書院)과 남명기념관을 보았다. 산천재는 선생이 만년에 평생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 전수하고, 사림(士林)의 중심이 되어 임난 의병을 일으켜 국난극복의 선봉이 되었던 곳이다. 서북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며, 그곳에서 발원한 물이 중산(中山), 삼장(三壯)으로 흐르다가 양당(兩塘)에서 합쳐 덕천(德川)을 이루는 아담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덕천서원(德川書院)은 남명선생의 학덕을 기리려고 1576년 문인들이 세웠으며, 임란 때 소실되어 1602년 중건되었으나, 대원군 때인 1865년 철폐되었다가 1926년에 복원 되었다. 옥산, 도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서원으로 불리며 강우(江友) 48가를 영도해온 유서 깊은 곳이다. 남명기념관은 남명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유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남명 탄신 500주년에 설립이 추진되어 2004년 완공되었다. 내부에는 서책을 비롯한 유품과, 외부에는 신도비(神道碑), 남명 선생 석상, 제사를 드리는 여재실(如在室), 강가에 세심정(洗心亭), 뒷산에는 묘소(墓所)가 있었다.
특히 기념관 출입문을 성성문(惺惺門)으로 부르고, 기념관 내부 벽의 신명사도(神明舍圖)는 남명선생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남명사상의 핵심은 경(敬)과 의(義)로, 자신의 창문과 벽에 두 글자를 붙여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선생은 항상 경의검(敬義劍)이란 장도(粧刀)을 차고, 성성자(惺惺子)라는 작은 쇠 방울 두 개를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다고 한다. 칼에는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內明者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外斷者義)’라는 글귀를 새겨두고 칼을 만지며 자신의 마음을 단속하였고, 성성(惺惺)은 ‘마음이 별과 같이 항상 깨어 있는 청명하고 맑은 자아를 의미하여’ 움직일 때 방울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정신을 차려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생활을 통해 성인이 걷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리고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로 도식화 한 것이며, 성곽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데, 뇌룡정을 짓는데 설계도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남명이 위대한 성리학자가 된 것은 ‘성성자’ 덕분으로 평가하듯이 남명은 항상 스스로 경계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았으며, 평생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힘을 가졌었다. 남명은 조선시대 좌(左)퇴계, 우(右)남명의 양대 산맥을 이룬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이론가인 퇴계와는 달리 과격하고 직선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독특한 성품을 가졌으며,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완성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의경(義敬)을 존중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여 임란(壬亂)때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 의병장(義兵將)도 배출했다. 개인의 성찰보다 물욕에 눈먼 현시대에 큰 귀감이 될 합천이 낳은 위대한 유학자이며 큰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