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너무 늦게 왔군요 – 교육이야기

공원석
논설위원

서양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철학자 칸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칸트는 “잘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그녀와의 혼인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먼저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분석했습니다. 사랑과 혼인에 관한 책을 읽었고 혼인에 대해 찬성과 반대하는 의견을 공책에 적어서 분석도 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느라 시간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이젠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이보다 더 신중한 결론을 얻을 수는 없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 만족하면서 누구보다도 근사하게 청혼하리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녀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칸트에게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 내 딸은 이미 혼인해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소. 당신은 너무 늦게 왔군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중국춘추전국시대 때 노나라 “소공”이 제나라로 도망와서 하는 말이 “내 주위에는 간신배들만 있어서 내가 이 모양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나라 명재상인 안영이 “어리석은 자는 후회가 많고, 불초한 자는 스스로 현명하다고 한다. 길 잃은 자는 길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고, 물에 빠진 자는 물길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을 잃고서야 길을 묻고, 물에 빠져서야 물길을 찾고, 전쟁에 직면해서야 전쟁에 관한 무기를 만들고, 음식을 먹다가 목이 메서야 물을 마시기 위해 급히 우물을 판다는 것은 아무리 빨리 한다고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저승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논의도 인류의 역사 이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논쟁입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저승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죽어서 저승이 있으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저승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다가 죽어서 저승이 없어도 그것은 밑져야 본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승이 있다고 생각하는 삶과 저승이 없다고 생각하는 삶은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편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죽어서 저승이 있으면 그제야 “아! 저승이 있구나.”하며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때가 너무 늦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어제 오늘의 과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수십 년 동안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개미 쳇바퀴 돌듯이 헤매고 있습니다. 국민의 뜻을 모아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 누구의 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봅니다. 그 결과 우리 교육을 백년대계가 아니라 오년소계도 못된다고 비아냥거림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육개혁의 과제들이 산적한 속에서 모래시계처럼 시간은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리 교육의 중심을 잡을 인재는 그리도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이러하다가는 “훌훌하다가 훌쳉이(밭이나 논을 가는 데 쓰는 농기구) 떨군다.”는 속담처럼 모두를 잃어버리지나 않을지 걱정됩니다. 교육개혁의 길은 교육현장에 있으므로 교육개혁의 방안을 교육현장에서 찾아야 합니다. 때문에 선진국의 교육정책에만 매달리지 말고 우리 속에서 우리 것을 찾는 열정과 성숙이 교육개혁에 꼭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