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읽는 동화| 꿈꾸는 빈 병 – 소민호 동화작가
“아, 덥다!”
산에 오르던 아이가 내 안에 든 음료수를 마신 뒤 활짝 웃었습니다. 음료수가 다 빠져나간 내 속은 허전했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이 아이의 웃음보다 더 멋진 웃음을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부터 더 큰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아이가 나를 하늘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앗, 안 돼!” 나는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몸은 파란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눈이 빙빙 돌았습니다. 하늘을 날던 나는 땅에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눈을 꼬옥 감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뛰는 가슴을 겨우 가라앉히고 눈을 살며시 떴습니다. “앗, 저건!” 가슴이 서늘했습니다. 내 코앞에는 뾰족한 돌멩이가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굴렀더라면 영락없이 깨진 유리 조각 신세가 될 뻔했습니다. ‘고마워할 줄 모르고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이게 말이 돼?’ 내 빈 가슴은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바람을 붙잡고 막 울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것은 저마다 할 일이 다 있다고 했어.” 옆에 있던 키가 작은 보득솔이 말했습니다. “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나는 풀 무더기만 한 어린 소나무를 쳐다보며 눈을 흘겼습니다. 정말 볼품없는 소나무였습니다. “내가 솔방울 안에 있을 때 엄마가 그랬어.”
나는 보득솔을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초록빛 꿈을 잃지 않는 보득솔이 나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습니다. 나는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빈 속에 뭔가를 채워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지쳤습니다. 바람을 잡고 몸부림을 치려고 해도 코앞의 뾰족한 돌멩이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왔습니다. 나무들은 저마다 연둣빛 잎을 쏙쏙 밀었습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다람쥐들도 나뭇가지 사이로 뛰어다녔습니다. 새싹과 내 몸 빛은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 곱던 내 몸 빛깔은 흙먼지가 앉고 때가 묻어 볼품이 없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엔 흙을 머금은 빗물이 내 안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렇게 쌓인 흙은 내 몸을 더욱 무겁게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내 속에는 흙이 더 많이 쌓였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이렇게 살 수는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산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흙을 보자 다시 힘이 쑥 빠져나갔습니다. “어이, 빈 병, 땅 꺼지겠다. 웬 한숨이야?” 나뭇가지에 앉은 다람쥐 한 마리가 꼬리를 쫑긋 세우며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동안 오가면서 얼굴을 익힌 다람쥐였습니다. 장난꾸러기라 썩 반갑지는 않지만 말동무가 되어 줄 때는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응, 내가 할 일이 없어서 그래.”, “너는 안 먹고도 살 수 있는데 웬 걱정이야?”, “쯧쯧, 먹는 게 그렇게도 중요하니? 우리가 살아가는 데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게 얼마나 많은데, 먹는 타령이야?”, “후후후, 모르는 소리. 굶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거야!”
다람쥐는 도토리 하나를 움켜쥐고 말했습니다. 먹이를 넣은 볼도 볼록했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이내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자, 이거 너 해.” 다람쥐는 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와 도토리 하나를 내 안에 쏙 넣어 주었습니다. 엉겁결에 받은 도토리가 참 예뻤습니다.
그때 내 속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도토리의 숨소리였습니다. “이걸 어쩌나?”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도토리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음, 곧 추운 겨울이 될 거니까 봄까지는 이렇게 있자!” 나는 도토리를 포근히 안아주었습니다. 바람이 제법 차가웠습니다. 다람쥐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떨어진 나뭇잎들과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오슬오슬 떨었습니다.
나는 바깥에 비치는 햇살을 모아 내 속을 데웠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누워 있는 흙에도 바늘을 한 움큼씩 꽂아 놓은 것처럼 하얀 서릿발이 일어섰습니다. 보기만 해도 으스스했습니다. 난 도토리가 춥지 않도록 내 속에 있는 흙에다가 햇살을 꼭꼭 심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나뭇가지마다 잎눈들이 탱글탱글 봄을 기다렸습니다. 유난히도 힘들었던 겨울이었습니다.
“아함!” 기지개를 켜는 도토리를 보자 내 가슴은 막 뛰었습니다. 음료수를 속에 담고 목마른 사람을 기다릴 때하고는 사뭇 달랐습니다.
‘어, 이게 뭐지?’ 내 안에서 뭔가가 꼼지락거렸습니다. 나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벌레가 내 속에 들어간 줄 알았습니다. “저… 미안합니다. 내 뿌리 때문에 많이 간지럽지요?” “아, 그랬구나. 네가 내 속에서 싹을 틔웠구나!” 난 가슴이 울렁거렸습니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습니다. 나는 따뜻한 햇살을 더 많이 들이마셨습니다. 밤이면 아직도 남아 있는 찬바람이 안으로 들어갈까 봐 마음도 졸였습니다.
어느새 산자락엔 봄비에 젖은 연둣빛 이파리들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나는 도토리를 위해 좁은 입으로 이슬과 빗방울을 받아 마셨습니다. 흙이 꼽꼽해졌습니다. 드디어 도토리는 딱딱한 껍질을 벗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좋아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내 키보다 몇 백 배나 클 도토리나무가 내 속에서 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새싹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는 새싹은 흙 속에 뿌리를 살살 밀어 넣었습니다. 온몸이 간질거렸습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새 혀만 하던 이파리가 차 숟가락만 해졌습니다.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여보세요. 누구든지 나 좀 도와주세요!” 나는 목청껏 소리쳤습니다. 키 큰 나무들이 내려다보았습니다. 지나가던 바람도 걸음을 멈췄습니다.
모두 놀란 눈빛이었습니다. 아직까지 그렇게 고함을 질렀던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아니, 무슨 일이야?”, “뭔지는 모르지만 꽤 다급한 모양이야!” 나무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산새들과 다람쥐들도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왜 그래?” 다람쥐 한 마리가 다가왔습니다. “내 속에 도토리나무가 자라고 있어. 꺼내서 땅에다가 심어 줘야 해!” 나는 울면서 애원했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해. 난 못해!” 다람쥐가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쯧쯧, 저 일을 어떻게 하나?” 나무들도 가지를 흔들며 걱정을 했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 다람쥐가 다시 다가와 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응, 지난가을에 어떤 다람쥐가 내 속에 넣어 놓고 간 거야!”
나는 다람쥐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다람쥐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팥알 같은 눈망울만 또록또록 굴렸습니다. “다람쥐야, 이 도토리가 다치지 않게 꺼내서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심어 주면 안 되겠니?”, “그건 좀 곤란해.”, “이 어린 나무가 불쌍하잖아. 좀 꺼내 줘!”
나는 조르고 또 졸랐습니다. “저… 새싹이 잘못되든지, 아니면 네가 깨져야 해!”, “뭐, 그걸 말이라고 해?” 다람쥐의 말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깨어진다면 내 꿈도 사라집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는 이 산속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그냥 빈 병일 뿐이야. 그렇지만 이 새싹은 산속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라면 내가 깨져야 할 것 같구나. 네가 좀 도와줘!”, “안 돼. 나는 할 수 없어!” 다람쥐는 도리질을 했습니다.
“내 소원이야. 제발 좀 도와줘. 난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다람쥐는 한참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난, 안 되겠어!”
다람쥐는 휙 돌아섰습니다. “앗!” 돌아서던 다람쥐가 쭉 미끄러졌습니다. 나는 미끄러진 다람쥐의 뒷발에 툭 차였습니다. 그 바람에 흙 속에 묻혀 있던 내 몸이 핑그르르 돌며 뾰족한 돌멩이에 부딪쳤습니다.
“퍼억!” 깨지는 소리에 다람쥐가 펄쩍 뛰었고, 나는 유리 조각이 되어 흩어졌습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나는 도토리나무의 어린 싹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도토리나무 새싹이 내 안에 있던 흙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산새들이 날아들 큰 도토리나무를 떠올리며 눈을 스르르 감았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