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보존프로젝트, ‘기록해서 남기자!’> 6편|네 곳의 향교를 품은 합천

8월 30일(금), “일 년 열두 달이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전해 오듯이 추석을 눈앞에 두고 고을의 큰 어른 선비 한분을 뵙고 고풍(古風)의 관례(冠禮)를 전해 듣는 행운을 얻었다. 평소 합천읍에 있는 향교를 ‘강양향교’라 하고 ‘합천향교’가 본군 야로면 구정리에 위치함을 흥미롭게 생각했었고, 특히 합천군에는 앞서 말한 두 개의 향교 외에 초계향교와 삼가향교가 있어서 매우 큰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다. 합천향교 전교를 역임하셨던 박원규(朴元圭: 남 73)님께 전해들은 말씀은,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습관화해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선비정신의 실천을 목적으로 하는 고려와 조선조의 지방 교육기관이 향교다. 성균관이 초시를 급제한 젊은이들이 학문한 중앙기관이고 합천향교는 지방의 기초 교육기관이면서 공자님을 비롯한 성인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춘추로 올리면서 학문과 그 정신을 계승 발전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자 업무다. 오성(五聖) 즉 공자, 언자, 증자, 자사, 맹자님과 소위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조육현(宋朝六賢)의 중국의 성현들과 해인사 가는 홍류동에 많은 시를 남겨 놓으신 고운(孤雲)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성현 18분을 모신 향교로서 조선 초기에 설립되어 역사나 전통적으로 전국에서 선두의 위치에 있다.
庚寅年(경인년)은 한국동란이 발발한 해(1950년)이기도 하지만, 우리고을에 큰 홍수가 난해(1890년)이기도 한데 이 때 합천읍에서 야로 구정리로 당시 군청과 향교가 이전되었다가 그 뒤 군청은 다시 읍으로 온 까닭에 합천향교는 야로에 위치한다. 그 뒤에 합천읍에 뜻있는 유림제현들이 읍에 향교를 하나 더 세우고 합천향교라 하려는 우여곡절이 많이 있었지만, 1987년 12월 31일에 군 유림들의 합의에 의하여 본읍의 옛 이름을 따와서 ‘강양향교’라 하고, 야로에 있는 향교는 전통의 맥을 이어 계속 ‘합천향교’라 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어 건물은 불타 소실되었으나 당시 선각자이셨던 정부인(鄭夫人)께서 제기를 비롯한 많은 유물을 우물 속에 감추는 재치로 보관한 것이 전국적으로도 아주 으뜸으로 고풍을 지키고 전통을 지키는 긍지 높은 향교이다. 요즘은 시대 흐름 따라 제사나 차례의식이 쇠퇴하는 경향이 있는데, 진설(陳設)이나 절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보다 옛날 선인들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고 인류애 정립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아니 할 말로 “남의 제사에 밤 대추 말라.” 했듯이 가풍이 다 다른데 거론함이 옳지 않다고 보신다면서 말씀을 돌리신다.
제사나 차례에 올리는 음식은 특징이 그 당시 시대에서 가장 고품격의 깨끗하고 맛난 것을 조상이나 선인에게 대접하는 의미임을 인식하고 행한다면 예의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 하신단다. 토테미즘에 입각하여 잡 귀신을 막는 제반 행위도 문화의 한 축이라 생각해야지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라고 본다. 박원규 님은 “다만, 최소한 유도회(儒道會)나 전교(典敎)를 비롯한 장의(掌儀) 정도라면 옛 풍습으로 전해오는 향교제례를 익혀야 하겠죠?”라 하면서 먼 곳을 바라본다.
/한봉수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