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랑스러운 내 고향 쌍백 – 정병수 재경합천문인회 회원
합천군 17개 읍면 중에서 자랑스럽지 않는 곳이 있을까마는 쌍백면(雙栢面)은 보석 같은 곳이다. 합천문화원에서 2019년 6월에 출간한 「합천지명사」에 따르면 쌍백면은 합천의 동남부에 위치하되, 특이하게도 지형 모양이 우리 인체의 해독작용, 단백질합성, 쓸개즙을 생성하는 대표적인 기관인 간(肝)처럼 생겼다. 간은 모든 내장 중에서 가장 크지만, 몸속 깊숙한 곳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쌍백은 바로 우리 인체의 간처럼 중요한 곳이다. 그런 사실을 늦게 안 것은 부끄럽지만, 알고부터 고향이 자랑스럽다.
쌍백 지명 유래와 측백나무
쌍백면이 이 세상에 태어난 지 올해로 90년이 되었다. 1929년 4월 1일 지방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장전, 운곡, 백역(栢亦), 하신, 삼리, 죽전을 관할하는 백산면(栢山面)과 평구 육리 대곡리 평지리 등을 관할하는 상백(上栢)면이 합해 두 백의 면이라 하여 쌍백면이 돤 것이다. 백(栢 또는 柏)자가 2개라는 뜻의 한문은 이백면(二栢面) 또는 양백면(兩栢面)도 가능했으나 쌍백의 쌍자가 다른 음보다 힘이 있고 당 시대의 정서에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백(柏, 栢)이라는 글자다. 흔히 잣나무 또는 동백나무 백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원래 측백나무를 뜻한다. 이 나무는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국가의 융성과 왕족의 안녕을 주는 나무로부터 귀하게 대접받은 나무이다. 특히 목화처럼 중국 밖으로 반출되는 것을 금지한 품목이어서 우리나라엔 귀했다. 그래서 비슷한 잣나무로 대체하여 잣나무 백으로도 부른 셈이다. 태산이 있는 중국 산동성의 공자(孔子) 고향인 곡부에는 공림(孔林)이라는 공자의 묘가 있는데, 그 경내 200만㎡(60만평)에는 오로지 측백나무 한 종류만 현재 약 10만 그루가 숲을 이루며 은은한 테르펜 향기로 찾는 이를 반겨주고 있다. 일반 먹물로 쓴 붓글씨는 100년 정도 유지되지만, 측백나무 잎을 넣어 간 먹물로 쓴 글씨는 600년을 간다고 한다. 더구나 우리나라 천연기물 1호가 대구 도동에 있는 측백나무 군락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쌍백의 지명에 측백나무 백자가 들어간 것은 학문을 숭상하고, 나라를 사랑하라는 기원이 깃든 것이다.
독립운동의 선봉자 고향
3.1독립운동을 얘기할 때 흔히 유관순 고향의 된 아우내(병천) 장터를 떠올린다. 아우내 독립운동은 4월 1일에 3천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도 훌륭하지만 쌍백면(당시 백산면)의 이원영(李愿永), 쌍백면(당시는 상백면)의 공민호(孔敏鎬) 등이 선봉대가 나서 한 삼가독립운동에 비할 일이 아니다.
1차 운동은 3월 18일 5일장인 장날에 장터(삼가면)에 모인 주민들이 합세해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지르니 일경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강제로 해산시켰다. 1차 독립만세 운동 후 그 다음 삼가 장날인 3월 23일에는 삼가 백산 상백 가회 대병 봉산 대양 용주 대의 신등 생비량 등의 유림 및 유지 그리고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모여 거사를 했다.
백산면 주민들은 백산면사무소(운곡리 소재)를 불 지르고, 가회 및 생비량 등 인근 주민들은 농악을 울리며 행진하면서 삼가장터로 집결했다. 주민들을 면장에게 만세 삼창을 하게 하고, 전주대를 넘어뜨려 통신을 마비시킨 후 삼가장터로 3만여 명이 집결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제의 혹독한 강압정치에 분연히 항거하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주민들에게 사자후를 토하는 마지막 연설이 끝나자 일경이 총격을 가했다. 이를 보고 분노한 주민들은 몽둥이와 낫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헌병과 경찰들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피바다로 변한 참상의 처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순국자는 40여 명이나 되고, 옥고를 치른 분이 50여 명, 부상자가 150여 명이나 되는 전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인데다 유관순의 아우내 만세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거사였다. 이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학문과 쌍백 묵동 출신의 노백헌(애산이라고도 부름) 같은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산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과 함께 영호남 유림들에게 의거할 것을 약속했지만, 외부 방해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아쉬운 점은 이런 역사적이고 향우로서 자랑거리인 삼가 3.1독립만세운동의 실체가 아직 온전히 공인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합천 백의종군로의 중심, 쌍백
민족의 성웅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사천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등의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1593년(선조 26)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한산도 대첩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전이라고 한다. 호사다마라고 할까 시기하는 사람 탓이라고 할까, 1597년(선조 30) 조정에서는 일본이 흘린 거짓 정보에 속아 그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고 한다. 일본의 계략임을 눈치 챈 이순신이 응하지 않자 파직되고 투옥되었다. 우의정 등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이 진을 치고 있던 합천(당시는 초계현)으로 백의종군하라는 벌을 받는다. 죄도 없는 죄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4월 1일에 서울 종각에서 출발해 6월 4일에야 합천의 초계현에 도착한다. 64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다. 그 종착점에 쌍백이 있다. 1597년 6월 2일자 난중일기에는 하동과 산청을 거쳐 합천군(당시는 삼가현)에 들어서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6. 2.> 저녁 나절에 삼가에 이르다. 삼가현 5리 밖에 홰나무 정자가 있어 앉아 있는데 근처에 사는 노순일 형제가 와서 보다.
<6. 3.> 비가 내려서 길을 떠날 수 없어 그대로 묵다.
<6. 4.> 맑음. 합천 땅에 이르러 고을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서 아침밥을 먹다. 너무 더워서 한참동안 말을 쉬게 하고, 5리쯤 가니 길이 쌍 갈래이다. 한 길은 합천으로 가는 길이요, 또 한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10리쯤 가니, 원수 권율의 진이 바라보였다.
40여일을 지낸 뒤 권율 장군한테 보고되는 해전의 상황은 연전연패 소식뿐이다. 할 수 없어 도원수가 백의종군 신세인 이순신에게 자문을 구하자,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했다고 한다. 음력 7월 18일이다. 이순신은 초계 도원수부를 떠나 쌍백, 삼가, 수곡, 정수역을 거쳐, 노량으로 가서 전황을 살펴보고 돌아오다가 8월 3일 진주 수곡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한다는 교지를 받은 직후 임지로 떠났다.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다음 해 11월 19일 새벽녘 적의 귀로를 차단하고 치른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죽으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한 마디로 합천 쌍백은 성웅 이순신의 백의종군 왕복 코스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한다. 이 자랑스런 고향의 역사를 나도 최근에 알았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후배들은 나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