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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 – 문계성 수필가

사상 최대의 인파가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찬 광장에서 거적을 뒤집어쓰고 밤을 샌다. 그들을 노숙에서 견디게 하는 힘은 가슴에 들끓는 분노일 것이다. 그들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그 분노 중 하나는 권력자들을 향하여 “왜 공정의 규칙을 어기는가? 공정하지 못하면서 왜 공정하다고 계속 우리를 속이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공정함이나 정직을 요구하게 되었을까? 원래 인류는 평등한 하나의 생명에서 탄생했지만, 이 물질계에 탄생하면서 차별에 시달린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지혜로운 자와 우둔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등, 그러나 탄생한 모든 생명의 목적은 존속하고 확장하는 것이므로 이를 위하여 무한경쟁을 한다. 이 물질계에서 물질적 생명을 유지하려면 더 강해져야 하고, 더 지혜로워져야 했을 것이다. 여성은 강하고 지혜로운 남성을, 남성은 아름답고 생산력이 좋은 골반이 큰 여자를 선호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로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하여 경쟁하게 되었을 때, 힘과 간계(奸計)가 판을 치는 세상이 만들어 졌을 것이다.
이런 야만(野蠻)의 세상에, 언제부터 공정함이나 정직이란 명제가 사회와 개인의 의식에 생겨났을까? 아마 시민사회(市民社會)의 발현과 인간은 동등한 생명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의 평등과 공정함의 역사적 시작은 1948. 8. 15. 남한 정부가 만든, 평등한 신분과 자유를 전제로 한 헌법에서부터였을 것이다. 조선이 망할 때 까지만 해도 인구의 10명중 3-4명이 노비였던 신분 차별적 사회였다. 신분 차별적 사회나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진정한 경쟁이 없다. 그것은 예초 불가능한 일이다. 경쟁은 신분평등과 자유라는 관념이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으며, 경쟁은 공정함과 정직을 대전제(大前提)로 한다. 공정함이 없는 경쟁은 폭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등이나 공정은 인류의 진보와 정의를 대변하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오용이 많다. 부(富)의 착취를 저주하며 인류의 구원자로 나선 맑시즘은 그 폭력성과 비생산성 때문에 무너졌다. 이 맑시즘은 사실상 실패했지만, 이 사상을 애비로 하여 태어난 사상은 많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경쟁사회를 공격하는, 소위 PC(political corretness. 정치적 정도)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들은 “약한 처지에 있는 자야 말로 정의로운 자”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 곧 ‘정의’가 되었다. 이러한 관념이 신성불가침적 도덕률이 되어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사회 전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가난한 자, 난민과 성소수자, 페미니즘 등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불가침적 대상이 되었고, 정치적 순서에서 우선적 서열을 갖게 되었다. 더 나아가, 약한 것들과 같이 발맞추어 나가는 것이 ‘정의’이며, 이들 보다 한 발자국 더 앞에 나아갈 때는 차별이 되어 ‘불의’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PC적 관념은 정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적 상품이 되어버렸다. 소수자 보호는 위대한 가치이지만 이처럼 더러운 정치인들이 즐기는 정치적 상품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약 10 여 년 전, 민주화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정치적 상품이 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런 관념을 정치적 상품으로 파는 정치인들은, 경쟁을 살벌하고 잔인한 것이라 가르치고, 이성(理性) 보다는 감성을 중요한 덕목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시험도 치르지 못하게 하고, 성적도 매기지 못하게 학칙을 고치도록 강제한다. 그 결과는 아마 매우 게으르고, 무식하고, 이성적이지 못하고, 경쟁을 무서워하는 겁쟁이들이 양산되게 될 것이다. 죽은 사회,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생존을 위한 자발적 경쟁이 없다. 경쟁이 있다면 전체주의 지배자에게 아부하는 경쟁이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PC들의 노래를 아주 좋아한다. 마치 ‘로빈후드’처럼 정의롭고, 알라딘 램프 속의 ‘지니’처럼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거에서 표를 몰아준다.
그런데 이 PC를 파는 업자들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이 상품을 파는 자들 대개가 사실상 ‘강한 자’들이며, 땀 흘리는 노동을 하지 않는 자들이며, 그들이 저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성공한 자들이며, 체질상 그들이 존중해 마지않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보통 선택된 자들로서,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적으로 최상위 포식자(捕食者)에 해당하는 변호사나 교수 같은 지식 계급들이다. 고급정보를 가장 먼저 선점하는 자들이며, 입으로 먹고 산다. 그래서 그들의 손은 여자보다 더 곱다. 필연적으로 이들은 대중을 속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도 공정한 사람이며, 그래서 공정하게 살아왔다는 연극을 해야 한다. 그런 약자 코스프레는 곧 잘 들통이 난다.
공정한 경쟁을 통하지 않고, 문서를 위조하거나 가짜 공사금 채권을 만들거나, 온갖 특혜를 이용하여 입신양명에 성공한 사람이, 자본주의의 가장 병폐적 상황을 이용하여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왜 공정한 세상을 위한 개혁이란 것을 그렇게 열심히 부르짖을까? 더 많은, 더 안정적인 권력이나 부를 갖기 위한 기만적 정치 선전이 아니면 무엇일까?
생동하고 창조적인 사회는 경쟁하는 사회이며, 경쟁적인 사회가 되어야만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쟁은 서로에게 공정한 규칙을 요구하고, 그것이 시행되는지 서로 감시하기 때문이다.
진보라는 허울을 쓴 온갖 위선들이 난무하고 있다. 저 광장의 함성은 진보의 가면을 쓴 타락한 욕망을 향하여 쏟아내는 분노다, 도전할 줄 아는 용기와 건강한 경쟁을 사랑하는, 땀이 베인 과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저 광장의 찬 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며 목이 쉬어 외치고 있다.
“위선의 가면을 벗어라! 위선은 물러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