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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흔적과 현대적 조명

1.중국에서 제사 지내는 최치원 선생
2.최치원의 흔적과 현대적 조명
3.고운 최치원 순례길의 인문·관광적 가치
4.최치원, 풍류도의 본고장 합천 가야산

문창후 최치원 선생像. 이 동상은 함양군에서 추진한 고운 최치원 선생 역사공원 조성에 즈음하여, 함양군최씨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 기금조성은 경주최씨 관가정공파(안의·서하), 정랑공파(안의·부산중곡·서상), 절의공파(함양), 사성공파(지곡) 문중과 종친회원들이 기금을 조성하였고 탐진최씨, 화순최씨도 동참하였다.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문화의 힘은 국경을 초월했다. 최근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7인조 소년그룹 방탄소년단(BTS)의 위상을 볼 때, 문화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런 한국적 문화의 힘을 ‘한류’라고 현상으로 볼 때, 과거 중국에서 어린 유학생으로 출발해 당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천재문장가로 이름날렸던 ‘고운 최치원’선생이 그 선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최근 다시 재조명받는 것은 한국과 중국과의 친교와 교류 속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일이며, 고운 최치원 선생의 위상은 우리나라와 중국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만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가지고 있는 합천군에서 어떻게 최치원 선생을 기념해야 하며, 그 발자취를 찾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또는 관광객들에게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하는 사명감에서 이 글이 시작되었다.

지난 호에서 중국과 한국과 교류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양국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인 ‘최치원’ 선생이 조명되고, 중국 강소성 양저우시(江蘇省 揚州市)에는 <최치원기념관>이 있으며, 중국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최치원 선생의 기념사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호에서는 최치원 선생의 생애를 돌아보고 이를 현대적 관점에서 어떤 가치로 재조명하고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볼까 한다.
최치원의 생애는 크게 3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당나라 유학생활과 당의 관리로서 활약하던 시기
2.고국 신라로 귀국하여 한림학사로 쓰러져가는 신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이 시기의 최정점은 시무십일조이다.)
3.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지방관을 전전하다가 전국을 소요하며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한 시기이다.

남들이 백번 노력하면, 나는 천번 노력한다(人百之, 己千之)의 소년 최치원
열두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十二乘船渡海來) /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文章感動中華國) /열여덟 살에 문단을 휩쓸어(十八橫行戰詞苑)/ 단번에 과거에 급제했다네(一箭射破金門策)
만당(晩唐) 시인 고운(顧雲)은 최치원의 중국에서의 혜성같이 등장해 뛰어난 문장가로서 활동한 최치원을 이렇게 찬탄했다.
12살의 어린 최치원이 청운의 꿈을 품고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그가 험난한 타국생활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드날리는 이야기는 누구나 감탄할만한 성공스토리이다.
당나라로 먼 뱃길을 따라 떠나는 어린 최치원을 향해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하라!”라고 엄한 훈계를 내렸다고 한다. 최치원은 그 훈계를 마음에 새겨 조금도 잊지 않고 쉴새 없이 정진하였다.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마음으로 실로 남들이 백 번 노력할 때, 자신은 천 번을 노력하여 뜻한바 목표를 이뤄내고 만다.
자신이 직접 쓴 계원필경서에 나오는 어린 시절 이야기에 나오는 <남들이 백번 노력하면, 나는 천번 노력한다>(人百之, 己千之)는 말은 오늘날에도 많은 감화를 주는 문구이다. 특히 천재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인백기천(人百己千)’이란 말은 오늘날 먼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큰 힘이 될 수 있는 격언이라 하겠다.(함양군에 있는 최치원역사공원에 이 문구가 적혀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해외유학을 간 것인데, 부모의 조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홀로 그 먼 곳에서 공부를 하고, 유학 6년 만에 18세의 나이에 글로벌 인재 등용을 위한 당나라의 외국인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단 한 번에 장원 급제를 하고 만다. 그는 12살에 당나라에 들어와 6년 만인 18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며 문장가로 명성을 중국에 휘날렸다.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에 몇몇 관직을 거치다가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종사관으로 임명됐다. 이때 최치원은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쓰게 되는데, 이 격문을 읽던 황소가 간담이 서늘해져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회자되면서 최치원의 이름을 중국 천하에 떨쳤다. 그 격문은 공격과 회유를 적절히 배합한 명문으로 평가되어 수많은 필사본이 당나라 전국에 떠돌았다고 한다. 오늘날 이 문장을 중국 어린 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외울 정도라고 한다.
최치원은 토벌군사령부에서 종사관으로 근무한 공을 인정받아 승진을 하면서 황제로부터 비은어대(紕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으며 황제에까지 인정받으며 그는 당에서 출세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었다. 이렇게 당나라에서 출세할 기회를 잡았으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으며, 더욱이 금의환향하여 중국에서 배운 학문과 경험을 살려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는 의욕에 가득찼다. 그는 885년 봄 헌강왕11년 3월에 무사히 귀국한다.

귀국해서 정치개혁안 <시무10여조>를 올리다.
최치원이 29살에 귀국하자 헌강왕은 그를 시독 겸 한림학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한림학사로서 그동안의 국게교섭과 당나라 유학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와 당의 국제교섭에 관련된 중요한 외교문서를 10여년간 독점해서 쓰다시피 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해 <계원필경집>을 국왕에게 올렸다.
그러나 당시의 신라사회는 이미 국운이 다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의 공부(貢賦)를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최치원은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해 대리 작성한 각각의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가야산에 은거하여 신선이 되다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등과 교유하며,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세속을 벗어난 사람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가야산에 홍류동에 잇는 정자에서 은거하며 지었던 다음의 시는 당시 최치원 선생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미친 듯 물이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狂奔疊石吼重巒)
지척에서 주고받는 말도 듣기 어렵다네(人語難分咫尺間)
세상의 시비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常恐是非聲到耳)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쌌다네(故敎流水盡籠山)

오늘날 바라보는 최치원 선생의 업적과 재조명
귀국 후 문인으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살려 우리 민족 고유 문화을 시대에 맞게 그 우수성을 잘 고양시키고 기록을 남겼다는 업적을 들 수 있다. 그가 남긴 비문 등 문장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담겨 있다. 특히 신라문화를 풍류(風流)라 칭하며 낭랑비서문을 쓴 내용은 앞으로도 한민족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거론될 내용이다.
낭랑비서문에 보면,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이른다.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한 것이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된 뜻이며, 무위지사(無爲之事)로 처리하고 불언지교(不言之敎)로 행함은 노자의 종지 그대로이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모든 선을 봉행함은 석가의 교화와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 권4 진흥왕37년조
이렇게 한민족 고유의 문화를 풍류(風流)라는 단어로 규정하고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야산에 은거하여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남긴 흔적을 오늘날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풍류도 라는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융합하는 고유의 문화를 우리는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최치원 선생의 생애를 크게 살펴보면 현대적 가치를 찾아보았다. 다음은 전국에 걸친 최치원 선생의 유산과 흔적에 대해 알아보고, 이를 인문학적 가치와 관광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방안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또한 가야산에 은거해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을 합천에서 어떻게 조명해 나갈지 고민하고자 한다. /박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