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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코고무신 – 소민호 동화작가

나는 할머니와 참 오래 살았어. 물건이든 사람이든 한 사람과 몇 십 년을 함께 했으면 오랜 산 것 아닌가?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새색시 때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신었던 흰 코고무신이거든. 새댁은 귀한 나들이 때만 나를 신었어. 내가 닳을까 봐 발을 들고 다니다시피 하면서 말이야. 게다가 집에 돌아오면 닦아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어. 그 바람에 언제나 새신 같았지. “엄마, 고무신 왜 저기 올려 놔?” 세 살배기 아들이 선반을 가리켰어. “아버지가 처음 사 주신 선물이거든!” 새댁은 아들을 꼭 안아주었어. 참 행복해 보였지. 세월이 흘렀어. 새댁의 고운 얼굴에도 주름이 하나 둘 늘었어. 한 번씩 거울을 보고 세월의 흔적이라고는 했지만 서운한 눈치였어. 그래서 나는 아주머니라고 불렀어. 물론 내 목소리는 못 듣겠지만…….
아주머니가 행복해 하던 날이 생각 나. 하나 뿐인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날이었어. 어른이 다 된 아들이 근무할 곳으로 떠나는 날 아주머니는 한복차림에 나를 신고 읍내 버스 터미널까지 배웅을 했어. “어머니도 참,……!” 아들은 쑥스러워 하면서도 아주머니의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 눈치였지. “아무렴, 이런 날 한복을 차려 입고 코고무신을 신어야 당신이지!” 남편도 활짝 웃으며 좋아했어. “집에 자주 들러!”, “예,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십시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행복한 일에는 악마가 훼방을 놓는다고 했던가. 술을 좋아하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거야. 아주머니 삶에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이때만큼 슬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어. “이 흰 코고무신을 사들고 활짝 웃으며 사립문을 들어서던 당신 얼굴은 잊을 수가 없어요. 이제 그 웃음은 다시 볼 수 없겠지요? 그래요. 내가 지금이라도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면 매일 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화들짝 놀랐어. 그 곳은 죽은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잖아! ‘안 돼요. 거기는 산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고요. 그리고 아들과 나는 어떻게 해요?’, “어머니, 기운 차리십시오. 제가 아버지 대신 잘 할게요.” 아주머니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들 손을 꼭 잡았어. 굳게 잡은 그 손등에 핏줄이 파랗게 솟았어.
그 뒤로 한 동안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하지 못했어. 한복 입을 일이 없었거든. “어머니, 이 사람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여자를 데리고 나타난 아들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어. “오, 그러냐. 참하구나!” 아주머니는 두말없이 아들이 데리고 온 여자의 손을 꼭 잡아주었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주머니를 보고 나는 놀랐어. 늘 보는 모습이라 몰랐는데 까맣던 머리가 벌써 반은 흰머리였어. 할머니가 다 된 거지. 그렇게 몇 달이 흐른 뒤 아주머니는 아들 결혼식에 가기 위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를 신었어.
“참 오래도 신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어. 낡은 내 모습이 측은했던 모양이야. 결혼식은 아들이 사는 도시 예식장에서 했어.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도 아주머니는 참 많이 울었어. 일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딸이라고? 오냐, 애썼다. 내 곧 가마!” 아주머니는 아들 전화를 받은 뒤 서둘러 한복 차림으로 나를 신고 사립문을 나섰어. 미리 기다리던 택시는 아주머니를 태우고 잽싸게 마을을 빠져났지. “어머니, 축하합니다. 이제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들이 병원을 들어서는 아주머니를 데리고 병실로 갔어. “아기는……?”, “신생아실에 있어요. 시간 맞춰 볼 수 있답니다.” 할머니가 된 아주머니는 아들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누워 있는 며느리 손을 꼭 잡아주었어. “아가,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 할머니 눈가에 맺힌 눈물이 내 코에 똑 떨어졌어. 눈물이 따뜻했어.
“어머님, 아들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얘가 무슨 말을 하누.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무 말 말고, 맑고 밝은 사람으로 키워!” 할머니는 젖은 눈을 흘기며 며느리를 꼭 안아주었어. 그 바람에 나도 울 뻔 한 거 있지. 그 뒤로는 오랫동안 나들이 할 일이 없었어. “쯧쯧쯧, 이제 이 고무신도 여기저기 트는구나.” 할머니는 오래되어 턱턱 갈라지는 나를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혀를 찼어.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할머니는 나를 신기는커녕 닦아주지도 못했어.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 나는 늘 선반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어. 병원에 가 있는 할머니를 기다리면서 말이야. “어머니는 저걸 왜 가져오라고 하시죠?”, “아버지가 사 주신 고무신이거든.” 빈집에 할머니 아들 내외가 들어서며 나눈 말이었어. 며느리는 선반에 놓인 나를 보자기에 곱게 싸들고 병원으로 갔어.
“어머니, 가지고 왔습니다.”, “오-냐- 휴우-, 수고했다.” 할머니는 힘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나를 천천히 받아 들었어.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에 기댄 할머니 모습이 더 여위었어. 나는 뾰족한 코끝이 시큰했지. 할머니는 나를 쓰다듬었어. 주름지고 거친 손이지만 따뜻했지. “여보, 참 행복했소.” 할머니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어. 다음 날이었어. 할머니는 잠을 자듯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어.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할머니 손을 잡고 가만가만 눈물을 흘렸어.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드린 가족들은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했어. 몇 안 되는 유품들은 대부분 버릴 것들이었지.
“여보, 이 고무신……?” 며느리가 나를 들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어.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아내를 꼭 안아주었어. 나도 코끝이 찡했지. “이 코고무신을 보면 꼭 어머니를 보는 것 같아요.”, “우리는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리워 하셨을 거야.”, “이 집은 어떻게 하지요?”, “어머니가 사시던 집인데……!” 아들은 그대로 두고 한 번씩 와서 어머니를 느끼고 가자고 했어. 며느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나를 선반 위에 올려놓았어,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마당과 뒷산을 날아다니던 동고비 한 쌍이 집 안을 기웃거리는 거야.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둥지 틀 곳을 찾고 있어요.”, “그렇구나. 이 집에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빈집이 됐구나. 그러니 적당한 곳에 둥지를 틀어보렴.” 나는 말동무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음, 어때?” 수컷 동고비가 부리로 나를 가리켰어. “좋긴 한데, 허락하겠어?” 망설이던 암컷 동고비가 포로롱 날아올라 내 안을 기웃거렸어. “고무신 님, 이 안에 둥지를 틀면 참 좋겠어요.”, “뭐, 내 안에……?” 나는 암컷 동고비의 말을 듣고 얼른 대답을 못했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동고비 두 마리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내 눈치를 살폈지. “둥지라……, 그거 괜찮겠네!” 나는 남의 일처럼 말했어. “고맙습니다, 고무신 님!”
그날부터 동고비들은 부드러운 마른 풀을 물어 날라 내 안을 폭신한 둥지로 만들었어. 이제부터 이 동고비들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