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의 강현(絳縣)에 관한 문헌적 고찰 – 공원석 합천군 쌍백면 장전리(짐밭골) 태생
들어가는말|
1980년 이후에 발간된 합천군 연혁이 기록된 합천군지(陜川郡誌, 1981년)나 합천군사(陜川郡史, 1995년과 2013년)등의 자료에서는 “인조 7년에 역옥죄인이 탄생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했다가 인조 22년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최근에 발간된 자료(합천군연혁과 문화개괄, 2009년; 합천지명사, 2019년; 합천읍지, 2019년)에서는 인조 앞 정권의 실세인 내암 정인홍의 고향이라는 사유가 덧붙어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 자료들에서는 합천군의 강등에 대한 문헌적 자료나 근거 제시가 불충분하여 이들 내용에 대한 출처와 정확성을 확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소고(小考)에서는 먼저, 인터넷에서 공개된 자료조사를 통하여 합천군의 강등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옛 문헌을 수집하여 합천군의 강등에 대한 기록의 시작을 찾고자 하였다. 다음으로는 합천군의 강등이 행정적으로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내용 분석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의 근거 자료로 인조시대를 포함한 합천군수의 환적기록 등의 조사도 함께 행하였다.
본론|
1)합천군 강등의 기록이 진술된 자료 고찰
현재까지 조사된 과거 문헌에서 합천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고 최초로 기록된 문헌으로 추정되는 자료는 1786년경에 편찬된 듯한 합천군읍지(陜川郡邑誌)와 합천읍지(陜川邑誌)가 있었다(그림 1). 이들 자료에는 “仁祖朝己巳以逆獄罪人胎生鄕降號爲縣甲申還陞爲郡”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00년경에 편찬된 자료로는 경상남도읍지•합천(慶尙南道邑誌, 1832년경), 영남읍지•합천(嶺南邑誌, 1871년경), 경상남도합천군읍지(慶尙南道陜川郡邑誌, 1899년경)이 있었으며 합천군 강등에 1786년경과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들 자료 중에서 경상남도합천군읍지(1899년)에는 역옥죄인이 아닌 역적죄인 태생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림 2).
또한 1900년 중반까지 편찬된 자료로는 구합천군지(舊陜川郡誌, 1915년), 합천읍지의 을묘신증(1915년)이 있으며, 이들 자료는 1981년 발간된 합천군지에 합책되어 있다. 또한 합천군읍지(陜川郡邑誌, 1920년. 역적죄인 태생으로 기록), 합천군지(陜川郡邑誌, 1936년)가 있었다.
그리고 1980년 이후에 편찬된 자료에 합천군의 강등에 대한 기술내용을 살펴보면, 합천군지(陜川郡誌, 1981년)에는 “역옥죄인 태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합천군사(陜川郡史, 1995년 과 2013년)에서는 “⌜경상도지리지⌟에는 위의 기록 외에 인조 7년에 역옥죄인이 탄생한 고을이라 하여 현으로 강등했다가 인조 22년에 다시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라고 앞선 자료들과 달리 합천군의 강현에 대한 문헌적 근거를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최근 자료인 합천군연혁과 문화개괄(2009년)에는 “서기 1629년(인조7년) 합천군이 합천현으로 강등. 앞 정권의 실세인 내암정인홍의 출생지라 강등됨. 서기 1644년(인조 22년) 합천현이 합천군으로 승격”이라고 기술되어 있어 서술내용이 합천군의 강등 뿐만 아니라 정인홍과의 관련성을 처음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합천지명사(2019년)에는 “1629년(인조 7)에 합천군이 합천현으로 다시 강등되었는데, 이것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서인(西人)이 합천출신으로 광해군 때에 정치를 주도한 북인의 영수 정인홍을 역신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었다. 1644년(인조 22)에 합천현은 군세가 반영되어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인조반정’, ‘정인홍’, ‘역신’ 등의 용어가 새롭게 추가되어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간된 합천읍지(陜川邑誌, 2019년)에서는 “서기 1629년(인조 7년)에 합천군이 합천현으로 강등. 앞 정권의 실세인 내암 정인홍(직위 영의정)의 출생지라 강등됨. 서기 1644년(인조 22년) 합천현이 합천군으로 승격.”으로 합천군연혁과 문화개관(2009년)에서 진술된 내용과 동일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2) 경상도지리지 내용 고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합천군의 강등기록이 ‘경상도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한 합천군사(陜川郡史, 1995년)와 합천군사(陜川郡史, 2013년)의 진술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경상도지리지의 내용분석을 행하였다.
‘경상도지리지’는 1425년에 처음 발간되었고, ‘경상도속찬지리지’는 1469년에 개정 발간되었다. 그 이후 일제강점기에 일본어로 번역본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와 같이 ‘경상도지리지’와 ‘경상도속찬지리지’는 합천군의 강등이 이루어졌다는 인조 7년(1629년)보다 각각 196년에서 160년 전에 만들어진 사료(史料)로 합천군의 강등과 시기적으로 맞지 않고, 또한 이들 자료에서는 합천군의 강등이나 승격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경상도지리지는 일본어로 제작되어 있어서 열람하지 못했다.
3)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관련 내용 고찰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역모로 인하여 고을을 강등시키거나 혁파시킬 때는 중신들과 의논하여 임금이 최종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합천군이 강등되었다면 이와 관련된 논의나 결정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여 내용을 살펴보았다.
먼저, 인조 7년에 있었던 역모사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김경형 상변사건, 임경사 역모사건, 양경홍 역모사건 등 3건이 있었다. 이들 사건들은 모두 합천(혹은 합천사람)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인조 9년에 기록된 신미년 역모사건은 인조 9년 2월 3일 조흥빈(옥천 인)과 한설(공주 인)의 고변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권대진 등 16인을 잡아 국문한 사건으로 합천사람과 관련이 있다.
(3) 승정원일기(인조 9년 신미 2월 26일)
◎ 처형된 역적 문일광의 고향 합천 등의 처치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할 것을 청하는 이조의 계.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문일광(文日光)과 정한(鄭澣)은 모두 합천(陜川) 사람이고, 양천식(楊天植)은 대흥(大興) 사람인데 이미 처형되었습니다. 법으로 볼 때 그 수령을 파직하고 다른 읍에 합병해야 마땅하지만 합천의 경우는 물산이 많고, 땅이 클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풍속이 더럽다고 일컬어져왔는데 이제 역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니 수토관(守土官)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별도의 처치가 있어야 할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러한 인조의 결정에 2월 30일 3정승이 논의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인조 9년 2월 30일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4) 조선왕족실록(인조 9년 2월 30일)
◎ “역적의 고을 합천은 혁파해야 되나 수령만 파직하고, 그 고을은 그대로 두다.”
이조가 아뢰기를 “역적 문일광·정부·정한은 합천사람이고, 양천식은 대흥 사람으로 이들은 이미 정형에 처해졌으나 법으로 보면, 그 고을의 수령을 파면하는 동시에 다른 고을에 합병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합천은 물산이 많고, 땅이 넓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풍속이 더럽다고 소문이나 도적들의 소굴이 되었으니 그 지방을 다스리는 관원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별도의 조치를 취해야 마땅할 듯하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오윤겸 등이 아뢰기를 “역적의 고을을 혁파해야 된다는 것은 법으로 볼 때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 합천을 강등시켜 현으로 만든다 하더라도 실은 큰 고을입니다. 게다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소문이 났는데 이들을 제압하고, 수습하는 것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하루라도 그 자리를 비워 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해조가 청한 대로 그 수령만 파직하고, 그 고을은 그대로 두는 것이 참으로 옳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이러한 의논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인조 9년 2월 26일에 올린 이조의 계에 따른 의논이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먼저 합천군은 인조 9년 2월 30일까지는 현으로 강등되지 않았고, 2월 30일 회의를 통하여 합천 고을은 강등 없이 그대로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승정원일기(인조 9년 3월 1일)
◎ 합천군의 읍호강등에 대해 대신에게 수의한 결과를 보고하는 이조의 계.
이조가 아뢰기를, “합천군을 처치하는 일과 관련하여 대신에게 의논하니, 삼공(三公)의 의논은 모두 ‘역적의 고을을 혁파해야 된다는 것은 법으로 보아 당연합니다. 그러나 합천의 경우는 지금 비록 강등하여 현(懸 : 원문엔 縣으로 기록되어 있음)으로 삼더라도 실제로는 커다란 읍(邑)인데다가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정인홍(鄭仁弘)의 무리가 기세가 대단하였는데 읍재(邑宰)가 없어 처단하기를 엄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변고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제압하여 수습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하루라도 비워 둘 수 없습니다. 그 수령만 파직하고 그 읍을 그대로 두는 것이 혹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대신의 뜻이 이러합니다.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하니, 의논한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이 보고는 2월 30일에 인조에게 삼공(3정승)이 논의한 결과를 보고하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합천군을 현으로 강등하지 않기를 바라는 삼공의 의논 결과를 보고받은 후 인조는 합천군을 그대로 두는 것으로 결재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4) 합천군수령의 환적기록 고찰
합천군사(2013년)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에 기록되어 있는 합천군수 환적의 기록에 의하면, 인조 7년의 합천군수는 이민수(李敏樹)이었고 인조 8년(1630년) 상피(相避)로 해임되고, 그 뒤를 이어 인조 8년에서 인조 9년까지 도임한 합천군수 정연(鄭沇, 재직기간 : 1630.10.21.~1631.3.12.)은 역향체귀(逆鄕遞歸)로 기록되어 있다. 정연 이외 조선조에서 역향으로 인하여 물러난 합천군수는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합천군의 합천현으로 강등에 대한 조정에서의 논의는 실제로는 인조 7년이 아니라 인조 9년에 이루어졌다.
5) 1750년 고지도(古地圖) 내용 고찰
1750년대 초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상도지도(고려대학 소장. 보물 제591호. 해동지도. 합천군도)의 여백에는 합천군 성곽, 호수와 인구, 행정구역, 관원(수령)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연혁엔 합천군이 현으로 강등했다가 군으로 승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결론
이번 자료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인조 7년에 합천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자료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1786(정조 10)년경에 편찬된 ‘합천군읍지’가 시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일부 자료에서 합천군 강등의 문헌적 근거로 제시되었던 ‘경상도지리지’를 살펴보았으나 합천군의 강등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시기(인조 7년)보다 150년 이상 앞선 출판된 자료이었으며, 내용을 살펴본 결과 합천군의 강등이나 승격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인조 9년(1631년)에 합천군의 강등에 대한 조정에서의 논의가 2월 26일에 이루어졌고, 삼정승의 논의의 결과를 받아들여 인조는 합천군은 군수만 교체하고 합천군을 그대로 두는 것으로 3월 1일 결재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또한 1631년에 3월 12일에 이의 내용에 부합되는 합천군수의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이번 결과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 조사에서는 수집된 참고자료의 제한이 있고, 이로 인한 결과에 대한 일반화의 한계도 있다. 따라서 인조 7년에 합천군의 강등이 이루어졌다는 기록과 이 소고에서 밝힌 내용들을 포함하여 외부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합천군의 강등에 대한 기록의 확인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소고에서 밝힌 자료 외에 합천군의 강등에 관한 실증자료가 있을 경우 이의 자료제시와 공유를 통하여 우리 합천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