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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색의 길 – 정병수 쌍백문인회 현 초대 회장

8년 전의 일이다. 결혼 후 12번째로 이사하던 날이었다, 짐 자체는 이사짐 센터에서 다 알아서 한다고 하지만, 주인으로서 챙겨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아내는 물론이고 나도 나름대로 이사를 준비하느라고 신경을 쓴 탓인지 오늘은 몸살에 머리까지 어질어질하다. 이제 이사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 것 같다. 분주하게 움직이다 보니 금새 점심 때가 되었다. 나는 아내가 주문한 짜장면을 거실 한쪽에 놓아 둔 채, 나의 심경을 말했다.
”여보, 나는 다시 이사 안 갈 거야. 우리 삶에 이사는 이것으로 끝이야! 알았지?“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상황이 변하면 난들 어쩌겠어?“
아내의 반응은 이사를 또 갈수도 있다는 여운을 남긴다.
사실 부동산을 매매한다든지, 이사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한 가정으로 보면 중대한 일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가정에서 이런 것에 관한 의사결정은 남편보다 아내가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직장에 다니는 남편의 경우 이사에 관한 사전 지식을 알아볼 시간도 없거니와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2년 전의 일이다. 아내는 상의할 게 있다며 같이 의논 좀 해 보자는 것이다.
”여보, 요새 우리가 가진 현금도 없는데, 지출할 곳은 많아 걱정이네.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이사를 가야 해결될 것 같아.“
” 여보, 이 집에 이사올 때, 다시는 이사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정말 이사를 꼭 해야 돼나?“
”당신 맘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대안이 있어야 말이지. 이 집은 전세를 놓고, 그 자금의 일부를 재개발에 투자한 부담금에 충당하고, 남는 돈에 맞춰 이사를 가야 할 형편이야.“
어조는 의논이지만, 보유 자금이 없는 나로선 대안이 있을 리 만무하고, 결국 또 이사 갈수 밖에 없다는 통보를 듣는 자리였다. 그것도 이제는 서울특별시민에서 경기도민으로 가야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사 가기를 싫어하는 내 얼굴표정을 계속 보기가 민망한지 아내도 고개를 돌린다.
그렇다. 아내의 머릿 속엔 이미 이사가 루비콘강을 건너가고 있는 모양이다. 아내의 이사작전 도상에는 이사라는 전투는 이미 종전되었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명예로운 입주를 할수 있을까 하는 고민뿐이다. 흔히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 라는 말이 있지만, 이왕에 하는 이사인데 마음을 편안하게 먹기로 했다. 이사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들만 둘인 우리는 애들 모두 결혼시켜 분가시켰기에, 학군과는 상관없이 입주할 아파트가 교통이 편리하고 주위 환경이 무난하면 되는 것이다.
‘살던 집이 전세계약을 하게 되면 시간이 빠듯하겠구나!’ 라고 생각중인데, 정말 살던 집이 금새 계약이 되어, 이사갈 집을 빨리 구해야 했다. 그래서 새 보금자리를 튼 곳이 ‘신분당선 상현역’ 주위의 아파트였다. 그 곳은 전세금도 서울에 비하여 저렴하고, 공기도 좋을 것이다. 이사 하는 날 새벽, 하얀 서설(瑞雪)이 우리를 축복하는 것 같다. 상현동은 나에겐 처음이라 낯설었다. 다만 전철역까지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라면 교통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 속에 한 나의 아전인수식 해석인 것이다. 즉, 우리는 ‘걸어서’ 5분 정도로 생각한 반면, 중개업자는 ‘승용차’로 5분이라는 뜻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사를 하고, ‘상현역’을 물어물어 가보니 30 여 분이나 소요되었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도 네 개의 정류장이나 지나야 되었다.
교통 하나는 편하겠지 기대하고 온 나로서는 실망도 컸다. 그런데 그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줄은 몰랐다. 입주할 아파트 앞쪽에는 야트마한 수목공원(樹木公園)이 있고, 그 수목공원으로 올라가는 쪽문이 있었다. 쪽문을 나와 산자락을 넘은 다음 신대호수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걸으면 상현역까지 15분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인적이 드문 이 길을 좋아한다. 아니 자랑하고 싶다. 입장료를 내고라도 걸을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래서 내가 자주 찾는 이 길을 ‘사색의 길’이라고 이름 지었다. 사색의 길은 봄이면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피고 제비꽃, 민들레 등이 미소짓는다. 개울 양 옆 언덕에는 쑥이 파릇파릇 잘 자라고 있다. 가위로 보드러운 쑥만을 잘라다가 국을 끓이면 구수한 고향의 향기가 묻어난다. 아마도 이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국이 있을 수 있을까?
개울따라 늘어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철조망 담장에 빨간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다. 레드 로즈 가든(Red Rose Garden)이 연출된다. 이 관경에 접하면 djg아무리 감정이 무디고,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던 발을 멈추고 사진 한 장에 추억을 넣거나,길 옆 군데군데 설치된 벤취에 앉아 사색에 잠기지 않을수 있으랴! 개울 물소리는 바닥의 높낮이가 바뀜에 따라 졸졸, 쫄쫄, 줄줄, 출출, 콜콜, 쿨쿨거리면서 우리 고유의 소리를 선사한다. 겨울이면 가을에 자란 갈대에게 하얀 눈이 살며시 내려앉아 친근한 친구가 된다.
올해도 벌써 2월 중순이다. 이삼일 전만 하더라도 쌀쌀하더니만 어제는 봄으로 착각할만큼 기온이 올랐다. 아파트 밖을 나서”니 훈풍이 불어온다. 곧 봄이 올 징후다. 어느새 나는 내가 이름 부친 “사색의 길”로 들어왔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내 짝궁은 도시락이 없어 대신 사발에 밥을 담고 감잎으로 덮어도시락을 가져온 모양이다. 부끄럽다고 생각한 그 친구는 한참이나 망설인다,
“가져온 밥 묵어! 벤또 못 가져온 애들도 많은데…. 니는 그래도 밥은 있다 아이가?”
내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지, 밥을 먹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래,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닐까?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든다. 아니야, 다음에는 긍정적인 사색을 해야지!”
그 때 서산에는 해가 붉게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