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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호의 맹수 – 이호석 논설위원

올 장마는 유난히 길고 폭우도 잦다. 매년 6, 7월이면 장마가 찾아오지만 짧게 지나가거나 비는 제대로 오지 않고 건장마로 끝나기도 한다. 그런데 올 장마는 지난 6월 중순에 시작하여 8월 상순이 지나가는데도 그칠 기색이 없다. 거기다가 동반한 폭우를 전국 곳곳에 쏟아부어 큰 피해를 주면서 온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장마가 시작되고 한동안은 강원도와 충청도 등 중부지역 일원에 폭우가 집중되면서 많은 피해를 냈다. 그동안 우리 지역에도 매일같이 흐리고 비가 내렸지만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솔직히 TV에서 다른 지역 폭우 피해 소식이 나오면 걱정스러운 마음은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으로 치부하며 깊은 관심은 가지지 않았다. 하늘이 나의 이런 심보를 괘심하게 여겼는지 며칠 전부터는 우리 지역에도 장대 같은 소나기를 수시로 퍼부으며 나를 불안케 한다.
지난 7일 오후,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며 매우 음습함이 몰려왔다. 불안한 심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메시지 신호가 들어온다. 합천군에서 보내온 메시지다. 오후 다섯 시에 합천댐 수문 5개를 모두 개방하여 초당 500t의 물을 방류하니 주민들은 침수피해를 보지 않도록 사전대비를 철저히 하라는 내용이다.
문자를 받고 나는 마치 반가운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좋아하며 인근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하여 댐 방류 광경을 보러 가자고 했다. 개방 예정 시간이 한 시간쯤이나 남았는데도 장대 같은 비속으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가면서 한편으로는 전국이 홍수로 물난리를 맞고 있는데 물 구경을 하러 간다는 게 조금은 아이러니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현장에 도착하니 벌써 상당히 많은 차가 댐 맞은편 도로변에 늘어서 있고, 뒤따라 계속 줄지어 올라오고 있다.
합천댐은 1988년 12월에 준공한 댐이다. 댐의 크기에 비해 유역면적이 좁아 댐 건설 후 한 번도 물을 만수위로 채우지 못했다. 지금까지 지역 주민들에게 볼거리 제공 차원에서 두서너 차례 일부 수문을 잠깐씩 열어 방류한 적은 있으나 오늘같이 만수위가 되어 수문 모두를 개방한 적은 없었다. 수문 모두를 개방한 폭포수의 장관(壯觀)을 상상하며 올라갔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몰려올 것이다.
도로변에 자동차가 늘어서 있지만 쏟아지는 비 때문에 대다수는 차 안에서 댐 쪽을 바라만 보고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 도로를 지날 때면 운전을 하면서도 댐 모습을 힐끗힐끗 쳐다볼 수가 있었다. 그동안 도로 옆 골짜기 나무들이 많이 자라 지금은 도로에서 댐 수문조차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나무키가 조금 낮아 수문이 보이는 곳에는 벌써 차를 먼저 대려고 쟁탈전이 벌어진다. 우리는 남보다 조금 일찍 올라온 덕분에 그런대로 수문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도착할 때는 이미 수문 세 개가 열려있었다. 넓적한 물기둥 세 개가 거꾸로 처박히며 물보라와 함께 우레 같은 소리를 낸다. 빗소리와 함께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린다. 마치 96m의 높은 콘크리트 벽을 넘어 바닥으로 떨어진 물이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니 비명이 아니라 환희에 찬 기쁨의 함성이다. 쏟아져 나온 물은 오랫동안 감옥 같은 댐에 갇혀 이리저리 맴돌다가 오늘 같은 기회를 만나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마음껏 활개 치며 좋아한다. 마치 장기수 죄인이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 문을 나서는 그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이제 마음대로 흘러가면서 다른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친구들도 만날 것이고 며칠 후면 그렇게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품속 같은 바다와 상봉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비속에 나가지도 못하고 차 안에서 5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구름이 짙고 장대 같은 비는 계속 쏟아진다. 떨어지는 물의 괴성과 함께 품어대는 물안개로 벌써 주위가 어둑해 오면서 조금은 음산하다. 다섯 시가 임박하여 시계를 보며 이 분 전, 일 분 전을 세고 잠시 기다린다. 정확히 제시간에 양측 두 개의 수문이 마저 열리면서 물기둥이 다섯 개가 된다. 방류수의 즐거운 함성이 더욱 커졌지만, 장대비 소리에 휩쓸려 누구도 그 소리를 귀담아 듣지는 않는 것 같다.
댐은 32년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수문 다섯 개를 모두 열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힘겹게 끌어안고 있던 7억9천만 톤의 물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초당 500여 톤씩을 쏟아낸다. 오랜 세월 감금하고 있던 물을 긴 장마와 폭우 때문에 댐 관리청에서 어쩔 수 없이 탈출을 방조한 것이다. 계곡 바닥에 떨어진 방류수는 갑자기 맹수(猛水)로 변하여 골짜기를 내달린다. 가다가 인근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황톳물을 만나면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다. 지금까지 강바닥에서 멋모르고 자라던 잡초들이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닥치는 대로 깔아뭉개며 신나게 내려간다. 호랑이보다 더한 이 용맹 앞에는 어느 누구도 맞설 자가 없다.
우리는 비가 끝이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차 안에서 창문을 살짝 열고 인정 샷만 누르고 돌아왔다. 그 후도 폭우는 계속 내렸고 휴대폰에는 수시로 방류량이 늘어난다는 메시지가 날아온다. 초당 800, 1000, 1500, 2000을 오르더니 2,600t까지 늘어났다. 그 사이 우리 마을 앞 강물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다음날, 또 다음날도 수시로 강물 구경을 나간다.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는 물을 보며, 어! 이게 아닌데! 싶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수문 모두를 방류한 지 이틀째, 마을 앞 체육공원 전체가 이미 어른 키 한 길이 넘는 물바다가 되었다. 이동식 대형 화장실이 기울어졌고 야구장의 그물망과 철주가 쓰러지는 등 많은 시설이 훼손되면서 처참한 전쟁터 모습으로 변했다. 오랜 장마를 등에 업고 폭군이 된 방류수(홍수)는 강바닥과 주변 잡초들에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다. 평소 만물의 영장이라며 우쭐되는 인간들도 이 앞에는 어쩔 도리 없이 당하기만 한다. 이번 장마로 전국에서 사망·실종자 50여 명과 만 명에 가까운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수많은 공공시설과 가옥, 농작물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피해를 당했다.
앞서 한동안 별 피해가 없던 우리 지역에서도 곳곳에서 큰 피해가 계속 발생했다. 그칠 줄 모르는 비로 모든 채소가 녹아 버렸고, 북숭아, 배 등 과수는 물론 고추, 참깨도 병이 들었고, 벼농사까지 정상 수확이 어렵다고 하니 올해 농사는 망친 모양이다. 또 댐 하류 지역에는 32여 년 만에 당한 큰 물난리로 아우성을 친다. 많은 지역의 농작물과 저지대 가옥 침수는 물론이고 상당수 가축이 죽고 떠내려가기도 했고, 황강과 낙동강 변 곳곳에 만들어진 공원과 체육시설도 큰 피해를 입었다.
댐을 탈출한 맹수는 험악한 얼굴로 우리 마을 앞을 지나간다. 지금까지 이유 없이 댐에 감금해둔 인간들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손아귀에 닿는 곳마다 닥치는 대로 찢고 할퀴며 목적지 바다를 향해 내달린다. 이런 피해 발생은 생각지도 못 하고 댐 방류 구경을 하겠다고 그 폭우 속에 찾아가 좋아했던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