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가 곧 행복이다 (3) – 변명규
그냥 걸어가! 뛰지 말고! 다쳐!
20세기가 저물어 갈 즈음 서울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에 자리한 ‘옛집’이라는 허름한 국숫집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그 국수집은 달랑 탁자 4개 뿐.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같이 연탄불로 진하게 멸치국물을 우려내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게 국수 값을 2천 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줍니다. 몇 년 전에 이 집이 SBS TV에 소개된 뒤 나이 지긋한 남자가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사연을 말했습니다. “15년 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아내까지 저를 떠나버렸습니다. 용산역 앞을 배회하던 저는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구걸했죠. 그러나 식당마다 쫓아냈고, 저는 잔뜩 독이 올라 식당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국숫집에까지 가게 된 저는 분노에 찬 모습으로 자리부터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나온 국수를 허겁지겁 다 먹어갈 무렵 할머니는 국수 그릇을 낚아채더니. 국물과 국수를 다시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그걸 다 먹고 돈이 없어 냅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연이어 뒤따라 나온 할머니는 소리쳤습니다. “그냥 걸어가, 뛰지 말고, 다쳐, 괜찮아!”
도망가던 그 남자는 그 배려 깊은 말이 그만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 파라과이에서 성공한 그는 한 방송사에 전화를 하면서 이 할머니의 얘기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곱게 자랐지만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이름조차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분에 넘치는 대학을 졸업한 남자로부터 끈질긴 중매 요구로 결혼을 했습니다. 너무도 아내를 사랑했던 건축일 하던 남편은 마흔한 살이 되던 때 4남매를 남기고 암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도 고생이 심해 어느 날 연탄불을 피워 놓고 4남매랑 같이 죽을까 결심도 했습니다. 그러던 차 옆집 아줌마의 권유로 죽으려고 했던 그 연탄불에 다시 물을 우려낸 국물로 용산에서 국수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첨엔 설익고 불고하던 국수를 노력 끝에 은근히 밤새 끓인 할머니 특유의 다시물로 국수 맛을 내서 새벽부터 국수를 팔았습니다. 컴컴한 새벽에 막노동, 학생, 군인들이 주된 단골이었습니다.
“하느님 이 국수가 중생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건강하게 하소서” 라고 아침 눈을 뜨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테이블 고작 네 개로 시작한 국수집이 지금은 조금 넓어져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 테이블은 밤이면 이 할머니의 침대입니다.
어느 날 아들이 일하던 아줌마를 데려다 주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입니다. 가게 문을 잠그고 한 달, 두 달, 무려 넉 달을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문에 쪽지가 붙었습니다. “박중령입니다. 어제 가게에 갔는데 문이 잠겨 있더군요. 댁에도 안 계셔서 쪽지 남기고 갑니다. 제발 가게 문 여십시오.
어머니 국수 맛있게 먹고 군대 생활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끓여준 국수 전 계속 먹고 싶습니다. 어머니 힘내세요. 옛날처럼 웃고 살아요. 가게 문 제발 여세요.” 어떤 날은 석장, 어떤 날은 넉 장, 사람들로부터 편지가 계속 붙었습니다. 힘을 얻은 할머니는 그제사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할머니 가게는 이제 국민의 국수집으로 불려집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배려와 사랑의 다싯물을 밤새 우려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모든 것을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행복으로 만드는 비결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배려와 연민입니다. 향기 나는 나무는 찍는 도끼에 향을 묻힙니다. 배려는 배려하는 사람에게 삶의 활력이라는 향이 풍깁니다.
고기를 모두 사 오너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홍학곡의 어머니 유씨는 천성이 어질고 매사에 사려 깊은 부인이었다. 하루는 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고기 한 근을 사오라고 계집종을 저자거리에 보냈다. 그런데 계집종이 사온 고기를 보니 빛깔이라든지 냄새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상한 고기임에 분명했다. 유씨 부인은 계집종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 고기를 사 온 푸줏간에 고기가 얼마나 남아 있더냐?” “글쎄요, 마님 상당히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부인은 방으로 들어가 장롱 깊숙한 곳에 두었던 돈을 꺼냈다. 그 돈은 급한 일이 있을 때 쓰려고 간직해 두었던 돈이었다. “너 이 돈을 가지고 가서 그 고기를 몽땅 사 오너라. 너 혼자서는 무거워 벅찰 테니 행랑아범이랑 함께 가거라.” “아니, 마님, 그렇게 많은 고기를 다 어디 쓰시려구요?” “네가 걱정할 바 아니다.” 종은 많은 고기를 사가지고 왔다. “수고했다. 뒤뜰 한 구석에 구덩이를 깊이 파고 그 고기를 전부 묻어라.” 계집종과 행랑아범은 영문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마님, 왜 이 아까운 고기를 모두 파묻으라고 하십니까?” “상했기 때문이다.” “그런 줄 아시면서 왜 큰돈을 들여 사 오도록 하셨습니까?” 그러자 유씨 부인은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고기를 모르고 사서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버려야 할 고긴데. 그러나 넉넉하지 못할 게 뻔한 고기장수가 이 많은 고기를 버리게 되면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닐 테니. 상심 또한 얼마나 크겠느냐. 그래서 내가 모두 사서 땅에 묻으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대단한 부인입니다. 고기를 사 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고기를 파는 사람도 배려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심부름을 보냈더니 먹지도 못하는 상한 고기를 사 왔으니 가만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통을 치며 물려 오라고 야단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인은 보통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넓고, 깊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평상시에 남에 대한 배려하는 정신이 몸에 배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처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가 그런 배려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면 그 사회는 바로 천당이요 극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