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찾기 (1)| 숨겨진 무학대사 수수께끼를 풀어라
(특집기획: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인한 쇠퇴해져 가는 지역을 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풍성한 ‘문화(文化)’라는 자산을 잘 간직하고 빛내는 것이라 본다.
특히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을 연구하고 창달하는 것은 지역민의 사기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콘텐츠나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방향에서 합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무학대사는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등 조선조 최고의 고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며, 민간에서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받았던 만큼 관련된 많은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인물이다. 이런 위인이 태어난 합천임에도 지역에서 관련 유적을 고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미진했다. 그러다 보니 근래엔 대사의 출생지를 합천이 아닌 충난 서산시라 주장하며 기념비를 세우는 등 출생지 논란이 있기까지 했다. 이에 무학대사와 관련된 지역의 유적을 밝혀내고, 무학대사가 합천의 인물로 배출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 전모를 밝혀내고자 한다.)

조선 최고의 고승, 무학대사
무학대사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다. 당시 한양천도(漢陽遷都)를 통해 조선 건국의 기틀을 세우는 데 관여하였을 뿐 아니라, 왕사라는 위치는 당시 정신적 최고의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조 이성계에게 당시 정치범 사면을 권하거나, 백성들을 어버이처럼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애민정책의 가르침을 주는 등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정신적 뒷받침을 했다. 또한 당시 숭유억불(崇儒排佛) 정책으로 인해 역사상 최고의 불교탄압을 받게 되는 조선시기에 그나마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다.
조선 후기 들어와서는 무학은 민초들에게 ‘풍수가’로서 친근하게 알려지기도 했다. 합천 지역에만도 여러 설화가 있다. 신승(神僧:기이하고 뛰어난 승려)이나 효자(孝子) 설화 등이다. 무학과 관련한 여러 가지 기록 야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설화 등에서 대사에 대한 민초들의 친근한 감정들이 잘 들어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학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지금도 관련된 사료와 남겨진 문헌 부족으로 인해 연구는 위기에 부딪친 상태이다.
무학에 대한 여러가지 수수께끼같은 문제가 있다. 무학이 남긴 자취를 찾아, 그의 진면목을 찾아낼 수 있게 차근차근 살펴보고자 한다. 마치 고고학자가 파묻힌 유골을 붓으로 먼지를 털어내듯 조심스럽게 실체를 향하고자 한다.
무학(無學)은 무학(舞鶴)인가
우리나라 글자는 한자문화권을 바탕으로 해서 현재는 한글을 주로 사용한다. 한자에서는 동음이의(同音異意:같은 음이지만 뜻이 다른) 글이 많다. 이로 인한 여러 가지 착오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있어왔다.
무학에 대한 이야기나 설화를 살펴보면 동음이어에 기초한 경우가 많다.
무학을 춤추는 학(舞鶴)으로 보는 경우는, 대표적으로 충남 서산 지역 출생설화에 나온다. 갓난아기인 어린애를 학이 보듬어 주어 체온을 유지시켜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춤추는 학–무학(舞鶴)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를 출생설화 테마로 잡은 것 부터가 출생설화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여진다. 무학을 ‘춤추는 학’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불교적 이유가 있다. 이어서 밝히겠다)
또 하나는 무학을 무학(無學)이라 뜻하여, 못 배워 무식(無識)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대표적으로 서울 왕십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무학대사가 새 도읍을 찾아 다니다, 왕십리쯤에서 좋은 자리라 여기고 결정하려는데, 밭에서 밭을 가는 농꾼이 “이 놈의 소가 미련하기가 무학같구나”하며 다시 도읍터를 알려준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무학은 미련하거나 못 배운 ‘무학’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학이란 말은 불교적으로 볼 때, 중요한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무학(無學)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배움이 없음’이 아니라 ‘배움을 끝냄’-완학(完學)이란 뜻이다. 즉 공부를 다 끝냈다는 최고의 경지를 가르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성인의 경지를 유학(有學)자와 무학(無學)자로 나눈다. 유학은 아직 배울 것이 남은 것이고, 무학은 이제 다 배움을 끝낸 것이다.
유학(有學)자는 1.수다원(須陀洹:預流) 2.사다함(斯陀含:一來) 3.아나함(阿那含:不還)이다. 무학에 해당하는 것이 4아라한(阿羅漢:無學道)이다.[*이에 대해 사향사과(四向四果)를 찾아보면 된다.]
즉 깨달은 사람들은 성인인데, 4단계로 나누어지고 최고의 단계가 무학, 아라한이다. (참고로 깨닫지 못한 일반 사람은 범부(凡夫)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보살(菩薩)도 엄밀하게는 성인의 분류에 넣지 않는다. 보살은 깨달음을 미루고 중생구도를 위해 바라밀을 닦는 이들이다.)
아라한은 번뇌를 다 끊은 이,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경지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 성자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공부하여 그 경지에 이르렀기에 부처(붓다)라고 하는 것이다.(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이들은 성문제자라 한다.)
그러므로 무학(無學)이란 말은 불교의 최고경지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최고의 칭호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불교계의 기본 이론에 해당하기에 조금이라도 불교학을 공부한 이들은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무학대사가 태어난 곳은?
최근 무학대사 출생지를 놓고 충남 서산에서 무학대사 출생지가 간월도(看月島)라고 주장을 하고 나선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헌은 단 한 곳, < 조선환여승람 서산군 명석편>에 유일하게 나올 뿐이며, 이 역시 논란되는 부분이 많다. 그보다는 1981년 이종익이 쓴 소설 무학대사라는 책을 근거로 1989년 서산군수가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에 무학대사기념비를 표지석을 세운 일이 있다. 검증되지 않은 설화나 소설 이야기를 근거로 기념비 등을 만드는 것은 역사왜곡의 단초가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일이며, 지자체의 관광사업과 연계된 단순한 헤프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에 비해 무학대사 고향이 합천임을 밝히는 문헌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많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1)고려사에서 ‘왕과 왕비가 승려 자초를 만나다’라고 나온다.
2)조선왕조실록 권5. 갑술년 3월. “삼기현사를 승격시켜 감무로 삼았으니, 왕사 자초의 본향이기 때문이다”고 나온다.
3)조선왕조실록 권2. 임신년10월. “중 자초를 봉하여 왕사로 삼았다”
4)지리지(地理志) 경상도 진주목 삼가현에 보면 “본조 태조 갑술년에 왕사 자초의 고향인 까닭으로 지군사로 올렸다”
5)양주 회암사 무학왕사묘암존자비문(무학대사비)에 보면 “대사의 이름은 자초(自超)요, 호는 무학이요, 계시던 처소는 계월헌이다. … 속석은 박씨이고 삼기군 사람(오늘날 합천군 대병)으로 아버지 인일은 숭정문하시랑에 추증되셨고, 어머니는 고성채씨이다. 어머니 채씨가 떠오르는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해, 1327년 9월20일에 대사를 낳으셨다. 강보를 벗어났을 때부터 다니면서 청소를 하셨고, 학당에서는 아무도 대사를 앞서지 못했다. 18세에 기쁘게 부처에게 귀의할 뜻을 품으셨다. 혜감국사의 뛰어난 제자 소지선사께서 머리를 깍아주고 구족계를 주셨다.
등등 그 외에도 많은 사료에서 무학은 삼기현(오늘날 합천군 대병면)사람이라고 나온다.
이외에도 고지도(古地圖)를 살펴보면, <해동지도>에서 무학대사 출생지가 표시되어 있다. 또 <광여도>, <비변사방안지도>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기록된 부도사와 무학대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악견산 금성산 허굴산의 삼봉과 고현, 병목 등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된다.
또한 대병면 등지에 무학대사 유허지, 부도사 등 폐사지가 발굴되고 있어 합천군 대병면에서 무학대사가 태어났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해동지도 삼가현에 악견산과 금성산봉, 허굴산 서쪽에 僧無學胎生處 라고 표기 되어 있고 황매산을 기준으로 동북쪽에 위치한다. 무학대사 출생지 외에 남명 조식선생 생가지가 정확하게 표기된 것으로 보아, 소생처 위치는 정확한 자료로 추정된다. *대병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평면의 大와 병목면의 並자를 따서 대병이라 하였고, 고현면도 대병면에 포함된다. 현재의 지도를 고려하면 대병면 유전리로 비정되므로 무학대사 출생지는 유전리 북서쪽에 위치한 대병면 대지리 일대로 추정된다.
무학대사의 숨겨진 과거
최근 있었던 무학대사 학술대회(11.13.합천박물관)에서 이윤상 창원박물관장은 “무학대사와 관련된 사료가 많지 않다. 조선 초기 대단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은 민간에 알려진 것보다 크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무학대사에 대한 다양한 전승들, 무학대사에 대한 신앙 등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그 둘 사이에 연관성도 있겠지만 크게 연관 찾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런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라며 의문을 던졌다. 또한 학술대회 토의 과정에서 “무학대사와 관련된 자료는 조선초기에 나오다가 200년 정도 자취를 감춘 후 선조실록 이후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며 이렇게 역사적 자료가 빈약한 것에 대해 ‘의도적인 자료 인멸’ 또는 ‘원래 없었다’로 볼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혹시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무학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무학의 저술인 <인공음>, <무학국사어록>, <불조종파지도> 등 전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무학과 관련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학문계에서는 지속적인 연구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고, 지역에서는 무학대사와 관련된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현창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다음편에는 무학대사의 생애와 사상, 역사적 활동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박황규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