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찾기 (3)| 삼화상으로 추앙받는 무학대사의 진면목
(특집기획: 인구감소와 노령화로 인한 쇠퇴해져 가는 지역을 살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풍성한 ‘문화(文化)’라는 자산을 잘 간직하고 빛내는 것이라 본다.
특히 우리 지역이 배출한 인물을 연구하고 창달하는 것은 지역민의 사기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콘텐츠나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방향에서 합천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무학대사는 조선의 기틀을 세우는 등 조선조 최고의 고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며, 민간에서 민중들에게 큰 인기를 받았던 만큼 관련된 많은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인물이다. 이런 위인이 태어난 합천임에도 지역에서 관련 유적을 고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미진했다. 그러다 보니 근래엔 대사의 출생지를 합천이 아닌 충난 서산시라 주장하며 기념비를 세우는 등 출생지 논란이 있기까지 했다. 이에 무학대사와 관련된 지역의 유적을 밝혀내고, 무학대사가 합천의 인물로 배출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 전모를 밝혀내고자 한다.)/박황규 기자

삼화상 진영으로 유명한 것은 경남 양산시 통도사에 있는 <양산 통도사 삼화상 진영(梁山 通度寺 三和尙 眞影/유형문화재 제277호)>이다. 통도사에 보존되어 있는 3폭의 초상화인데, 각각 지공(?∼1363)과 나옹(1320∼1376), 무학대사(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삼화상 진영은 의성 대곡사(1782), 개경 화장사(조선후기), 양산 통도사(1807), 여주 신륵사(조선 말), 순천 선암사(1904년), 그리고 남해 용문사(1900년), 양주 회암사(조선 말) 등에 전한다. 이 중에서 대곡사본, 화장사본, 선암사본, 용문사본은 한 화면에 세 분을 모두 그렸으며, 통도사본, 신륵사본, 회암사본은 총 세 폭이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삼화상 옆에는 각기 ‘서천국조사지공대화상진영(西天國祖師指空大和尙眞影)’, ‘공민왕사나옹대화상진영(恭愍王師懶翁大和尙眞影)’, ‘태조국사무학대화상진영(太祖國師無學大和尙眞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지공스님의 경우는 인도에서 출가 후의 법명인 ‘박타존자(薄陀尊者)’ 혹은 ‘박달타존자(博撻多尊者)’라고도 쓰여 있기도 하다. 화면 중앙에는 지공화상이 자리하며 그 좌측(바라볼 때 우측)에는 나옹선사, 우측(바라볼 때 좌측)에는 무학대사가 위치한다. (신광희 중앙승가대 교수 설명 참조)
삼화상도와 삼성각
삼화상(三和尙) 그림이 있다. 세 분의 큰 선사를 그린 초상화이다. 바로 무학대사와 그의 스승인 지공과 나옹 선사이다. 이 삼화상은 조선 후기 불교의식집인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 <범음집(梵音集)> 등에 나오며, 송광사 조석예불문에도 증명(證明)법사로 모셔져 있다. 이 증명삼화상(證明三和尙)은 사찰을 세우거나 불교의식을 치를 때 그것이 불법(佛法)에 부합함을 인증하는 3명의 승려라는 뜻이다.
이 3분의 화상은, 한국 절에서 칠성각 또는 삼성각(三聖閣)이라 불리는 사당의 원래 주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를 펴낸 자현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에 의하면 대규모 불교의식을 거행하는 사찰마다 삼성각에 이 세 분의 초상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등)
세 분 중 최고 스승인 지공 선사는 원래 인도 마가다국의 왕자 출신이다. 그의 부계(父系)는 붓다와 이어지고 모계(母系)는 달마와 이어진다. 붓다는 불교의 창시자고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창시자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불교 최고의 혈통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최고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옹 선사는 고려의 왕사였다. 이 둘 지공과 나옹을 함께 사사한 무학은 조선의 왕사였다. 이런 어마어만한 세 스님의 인가를 받았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야 말로 확실한 정통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자현 스님 주장)
*현재 조계종의 법맥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지만, 태고보우(太古普雨)스님을 중흥조로 보고 정통으로 치는데 자현 스님은 나옹 선사를 정통으로 주장한다.
지공 화상

지공(指空,?~1363) 화상은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인도 마가다(Magadha)국 왕자로 태어났으며, 8세에 계를 받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서 깊은 사원이자 대학이었던 나란타사를 졸업했다고 한다. 지공 화상은 19세 이후 인도 전역의 순례를 마치고 중국 원나라에 들어와 교화를 폈는데, 원나라 천자의 총애가 지극했다고 한다. 1326년(충숙왕 13) 3월 고려땅에 들어와 1328년 9월까지 2년 반 동안 한반도에 머물렀다.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 개경 감로사(甘露寺)와 숭수사(崇壽寺), 인천의 건동선사(乾洞禪寺), 양산 통도사 등 전국 사찰을 방문해 법회를 열었고, 경기 양주 천보산(天寶山) 자락에 절을 세울 것을 부탁하고 원(元)으로 돌아가 연경(燕京)에 법원사(法源寺)를 창건하고 머무렀다. 1372년(공민왕 21)에 그의 사리(舍利) 일부가 고려에 전해와, 왕명으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부도를 세웠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같은 내력은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지공화상 비문 ‘서천제납박타존자부도명병서(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幷序)’에 나온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고려로 들어온 이국 한 선사는 원 태정제(泰定帝)를 대신해 금강산 명찰에 향공양을 올리기 위한 어향사(御香使)로 고려에 파견됐다. 당시 지공 선사의 나이는 26세였다. 하지만 푸른 눈을 지녔다 알려진 이 인도 승려는 ‘살아 있는 부처’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2년 7개월이나 머물렀다. 푸른 눈의 외국 승려라는 점에서 최근 하버드대를 나와 화계사에서 출가한 현각(玄覺) 스님을 떠올릴 법 한데, 당시 그가 누린 위상은 오늘날의 달라이 라마에 비견될 정도였다고 한다. 개경 감로사에 머물 땐 그를 친견하려는 사람이 장사진을 이뤘고 하루에 수만 명에게 계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지공 화상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 원으로 돌아간 뒤로도 그의 문도가 되려는 고려 유학승이 줄을 이었다. 그런 지공이 자신의 제자 중 최고로 꼽은 인물이 나옹이고 그 나옹의 제자가 무학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인도의 최고승, 고려의 최고승, 조선의 최고승 셋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자현 스님 주장)
지공화상은 특히 선(禪)사상과 무생계법(無生戒法)의 계율관을 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불교는 나말을 기점으로 폭넓은 계층에서 선불교가 중흥되었던 터에, 한 이국(異國) 스님에 의해 수행자로서 투철한 지계정신을 재충전받으며 크게 고무됐던 것으로 보인다. 입국 이후 3년도 채 안 되는 이 기간 동안 고려불교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지공화상을, 위로는 왕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크게 환대했다는 기록이 그 같은 사실을 엿보게 한다.

나옹 화상

지공화상의 뒤를 이어 고려 말 불교의 찬란한 거목으로 꼽히는 나옹선사가 있다.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께 찾아가 출가했다.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 석옹화상(石翁和尙) 회상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24세 때(1344년)이다. 선사는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지도를 받고 자선사 처림(處林)의 법을 잇는다. 광활한 중국을 주유하고는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한다
원나라 황제의 청으로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개당법회를 열기도 했던 나옹은 광활한 중국땅을 돌아보고 귀국, 이번에는 공민왕과 태후의 청이 곡진하여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서 내려와 대궐로 발길을 옮겨 선법의 요체인 심요(心要)를 설한다. 이때부터 고려땅에서 주목받는 인물이 되고, 이곳 회암사에서 수행자와 일반 대중에게 불법을 펴 고려 말 불교를 새롭게 부흥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나옹선사는 4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하는 날 회암사를 떠나 밀양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 신륵사로 말머리를 돌려 거기서 입적한다. 1376년(우왕 2) 5월 15일, 세수 57세였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려 말 나옹 혜근의 작품으로, 불자들이 가장 많이 애송하는 선시 가운데 하나다. 가수들의 노래말로도 쓰일 만큼 널리 알려진 선시이다. <시에서 말하는 대로 주변 모든 만물이 우리에게 진리를 설해 주건만 우리는 예사로 보아 넘긴다. 삶은 길지 않고, 수행할 시간도 많지 않다. 짧은 인생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인생을 가득 채우며 산다. 무거울 텐데 짊어지고 있지 말고, 조금 내려놓으면 어떨까?> (정운 스님)
혜근은 첫째, 사교입선(捨敎入禪)적인 임제종풍의 ‘간화선’을 강조했다. 혜근은 그의 어록에서 임제종에 대해 “삼현삼구(三玄三句), 사료간(四料簡), 사빈주(四賓主) 등 할방(喝棒)은 임제종의 의지(意旨)일 수 없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역력고명(歷歷孤明)함이 자기에게 현전할 수 있는 그 본연의 세계를 얻는 것이 정종(正宗)”이라고 했다. 혜근이 중시한 화두는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무자구불성(無字狗佛性), 시심마(是什) 등인데, 혜근은 이 가운데 ‘시심마’를 매우 중시했다.
둘째, ‘공부십절목’을 통해 수행자의 정진 단계를 점검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는 공부선을 주관하면서 수행자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셋째, 염불 정토에 자력적인 측면과 타력적인 염불문, 두 가지를 모두 수용했다. 즉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와 칭명(稱名) 염불과 관상(觀象) 염불 등 타력 염불도 강조했다.

무학 대사와 삼화상

나옹선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무학대사가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화상을 만난 것은 1353년(공민왕 2). 이듬해, 역시 원나라에 들어와 지공화상의 법을 받고 있던 나옹화상을 법천사(法泉寺)에서 만났을 때, 나옹은 대번에 무학의 큰 그릇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나옹은 무학에게 “서로 안다는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다 해도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와 나는 이제 한집안이다” 라고 하며 법을 전했다. 이후에도 천성산 원효암에서 불자(拂子)를 무학에게 내리기도 했고, 1371년 나옹이 왕사가 되어 송광사에 머물 때는 의발(衣鉢)을 내리기도 하면서 나옹의 법맥이 모두 무학에게 전한다는 것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무학대사는 1376년 회암사를 중창한 스승 나옹이 무학을 불러 수좌(首座)를 삼고자 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길을 떠났다. 바로 그해 나옹은 왕명으로 회암사를 떠나다가 열반했고, 무학은 전국의 명산으로 다니는 만행을 떠났다. 어쩌면 국운이 다한 고려가 아닌 조선에서 불교의 새로운 맥을 잇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설봉산 토굴에 머물던 무학대사를 만나 꿈 해몽을 부탁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꿈에 무너진 집에 들어가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습니다. 또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었는데 무슨 징조인가요?” 무학대사는 장차 백성을 다스릴 임금이 되는 꿈이라 말하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조선 건국의 주역과 조언자로 깊은 관계가 형성돼간다.
이성계는 새 도읍의 터잡기 작업을 하면서 무학대사와 늘 동행해 다스림에 대한 담소를 거듭하며 의지처로 삼았다.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에게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작용은 하나이며,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절로 부강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또 법문과 함께 옥에 갇힌 사람도 방면해줄 것을 청원했다. 태조는 대사의 말대로 정치할 것을 약속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무학 대사는 고려말 불교계를 통섭하고 새로운 나라 조선에서 불교의 맥이 이어갈 수 있게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삼화상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삼화상은 고려 후기의 사회적 모순과 불교계 내부의 갈등을 개혁하고자하는 의지를 보였던 고승들이다. 조선시대의 억불의 분위기에서도 이들 삼화상은, 조사신앙(祖師信仰)의 대상이 되어 여러 곳에 진영이 모셔졌다. 조선전기 삼화상이 조사신앙의 예배대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함께 봉안하는 경향이 유행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들 삼화상을 어떻게 받들어져 왔는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를 통해 우리는 무학 대사가 불교계에서 가지는 위상과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불교계 명맥을 잇고자 했던 그 노력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다음 호에는 지역에 남겨진 무학의 자취와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살펴보겠다. /박황규 기자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