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설 명절을 보내고 – 이호석 수필가
신축년 올 설날은 내 인생 70 평생에서 처음 겪은 그야말로 별난 설이었다. 민족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내려온 설 명절의 즐거움이 깡그리 없어지고, 혈육 간의 정도 나누지 못하게 한 허망한 설이었다.
설을 며칠 앞두고 아들 삼 형제가 서로 번째로 전화가 왔다. 코로나19 때문에 5명 이상 모이지 못하게 하는 정부 시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삼 형제가 의논하여 교대로 오겠다는 것이다. 모처럼 형제, 조카, 손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즐거운 설 명절을 기대하고 있던 내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다.
설 사흘 전에 다시 전화가 왔다. 가까이에 있는 둘째 아들 가족이 설 전날 오후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설날 아침 일찍 떡국을 끓여 세배를 한 다음 오전에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저들이 출발하는 시각에 맞추어 대구에 사는 막내아들 내외가 와서 세배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간다는 것이다. 또 서울에 사는 맏이네 가족은 이달 마지막 주 삼일절이 낀 연휴에 다녀가겠다고 했다.
처음 전화를 받고는 아무리 정부 시책이라고 하지만,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지내는 설을 못 쉬게 하는 것은 너무 과한 조처가 아닌가 싶었다. 맏이 내외는 서울에서 많은 사람과 접촉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고 늦게 둔 초등학생 아들 하나가 있다. 둘째 내외도 공직에 있으며 중학생과 초등학생 두 아들이 있고, 셋째는 지난해 결혼하여 지금 며느리가 임신한 상태에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두가 코로나19 예방수칙을 철저히 지켜야 할 처지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이런 시국이다 보니 고향 한마을에 사는 우리 삼 형제도 각자 집에서 자기 아들 손자들의 세배만 받기로 했다. 그러니까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나 겨우 만나는 형제들이나 사촌들, 조카, 손자들이 서로 만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개중에는 간편하여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인정 어린 설 명절을 이렇게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고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게 풍족한 사회가 되면서 나와 내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고(思考)가 팽배한 데 코로나19가 그런 나쁜 풍조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도 하다. 모든 게 풍족하다고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인정과 인간미가 흐르는 그런 사회가 정말 아름답고 좋은 사회가 아닐까 싶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부모·형제와 이웃과 사회를 알고 그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평생 자기 풍족에만 집착한다면 먹이만 찾는 동물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까지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풍속인 설, 추석 명절이라도 있었기에 경로효친 사상과 혈육 간의 정이 이 정도라도 이어 온 게 아닐까 싶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더 각박하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작은 설날과 설날 오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설날 아침 둘째 아들 내외와 손자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막 떡국을 먹으려는데 서울 맏이로부터 제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스마트 폰으로 온라인 세배를 하겠단다. 평소 잘하지 않는 영상통화라 조금은 멋쩍었지만, 서울의 맏이 내외가 먼저 복장을 갖추어 공손히 세배하였고, 다음 손자의 세배를 받았다.
나에게 세배를 한 다음, 맏이와 둘째 아들 내외가 서로 동영상으로 인사를 하고, 바꾸어가며 조카들의 세배를 받는다. 그러고는 둘째가 금방 카톡으로 서울 조카에게 세뱃돈은 보냈다며, 나에게도 넌지시 서울 손자에게 세뱃돈을 보내라는 암시를 한다. 나는 모른 척하고 ‘참 편리하고 희한한 세상이다.’라고, 딴소리를 하며 슬쩍 서울 손자 놈의 세뱃돈은 주지 않았다. (세뱃돈은 2주 후 약속대로 내려오면 줄 작정이다) 이렇게 온라인 세배를 받는 것이 조금 어색하였지만, 전화 음성으로 받는 인사보다는 현실감이 있어 훨씬 좋았다.
올해는 조상님들의 산소 참배도 형제 가족별로 하기로 했다. 나는 대구에 사는 집안 장조카가 아들을 데리고 온다는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오가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세배를 받고, 셋이서 집 주위 가까이에 있는 선조들의 산소를 찾아가 공손히 잔을 올리며 참배하였다. 산소에는 벌써 다른 형제 가족들이 다녀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지금까지 매년 설, 추석 명절이면 형제, 조카, 손자들까지 20여 명이 함께 산소를 찾아 참배하며 즐겁게 보냈는데, 올해는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 아쉽고 조상님들께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신축년 올 설날은 어느 해보다 쓸쓸하고 재미없는 정말 별난 명절이었다. 설 같잖은 설날을 보내고, 혼자 조용히 앉아 어릴 적 즐거웠던 설날의 갖가지 풍경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추억 속을 거닐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