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합천군청을 야로면으로 이전한 이유와 연대 – 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14)

하재효
논설위원

합천군청이 야로면으로 이건(移建)된 적이 있었다. 그 연대와 군수, 장소, 이유 등을 알아보기 위하여 관련된 각종 고증 자료들을 바탕으로 궁금증 해소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자료 1> 합천군사(陜川郡史,陜川文化院 刊, 1997.12)
“옛날 병진년 수해 이래로 읍 소재지 이전이 자주 대두되어 오다가 지난 1890년(병인)에 군수 임치제(任穉帝)가 야로현(冶爐縣)으로 옮긴바 있으나 그곳에도 풍수해가 잦고 도로가 미개할 뿐 아니라 하천수가 범람하여 자연재해가 많으므로 그 후 40년 만인 계사년 민치순(閔致純) 군수에 의해 향교만 남겨놓고 다시 지금의 합천읍(陜川邑)으로 옮기게 되었다.”
<자료2> 합천군 연혁과 문화 개괄(陜川郡 沿革과 文化 槪括, 陜川文化院 附設 鄕土史硏究所 刊, 2009.12)
“조선 말엽까지 합천군 청사(廳舍)는 지금의 합천읍 영창리 이원동 마을앞 저지대에 있었으며, 1881년 대 홍수로 군청사가 큰 수해를 입게 되어 야로면 야로리로 옮겼다가 10년 뒤인 1891년에 다시 합천읍 합천리 789번지(지금의 邑청사 부지)로 이전하였다. 1977년 기구 확장과 공무원의 증원으로 청사가 협소하여 현재의 위치인 합천리 337번지로 신축 이전하였다.”
<자료3> 합천향교지(陜川鄕校誌, 합천향교지 발간위원회 刊, 4321 = 1989년)
“읍(邑) 터가 앞에 재방(堤防)이 있어서 수환(水患)의 염려(念慮)가 없더니 서기 1841년(辛丑) 대수(大水) 이후(以後)로 개사(溪沙)가 일적(日積)하여 강수(江水)가 점옹(漸壅)하니 지익비함(地益卑陷)이라. 서기 1880년(庚辰) 수변(水變)에 아사경비(衙舍傾圮)라. 자시(自是) 이후(以後)로 여러번 읍(邑)을 옮길 여론(輿論)이 있었으나 사거역중(事巨役重)하여 못 옮겼더니 서기 1890년(庚寅)에 군수 임치제(任穉帝)와 유림등(儒林等)이 갑자기 읍(邑)을 야로면(冶爐面) 야로리(冶爐里)에 옮기고 동시(同時)에 향교(鄕校)는 야로면(冶爐面) 구정리(九汀里)에 옮겼다. 이읍 후(移邑 後) 4년만인 서기 1893년(癸巳)에 군민의 여론에 의하여 군수 민치순(閔致純)이 구읍(舊邑) 남산하(南山下)로 이읍(移邑)하고 향교(鄕校)는 그대로 보존(保存)하게 되었다.”
<자료4>합천향교 상량문 발견(陜川鄕校 上樑文 發見)
이 상량문(上樑文)은 금년 봄(2016년 봄) 합천향교(陜川鄕校:冶爐面 九汀里 所在) 보수공사 시 발견되어 합천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이건 상량문 작성자가 “은진인(恩津人) 송기로 합천군수, 1892년”으로 되어 있다. (자료 제공, 하수갑 합천향교 총무) <계속>

*본보 제1023호 2면(13회), <茹州李公>을 <驪州李公>으로 바로 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