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장성의 고산서원에서 (2)

이성동
논설위원

일행이 필암서원을 나와 고산서원을 향해 가는 도중에 ‘G’식당에 들려 점심식사를 하고, 장성의 고산서당에 일행이 도착한 시각은 이날 오후 2시 20분,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은 고장, 장성군 황룡면 진원리, 서원 주변은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고즈넉한 농촌마을이었다.
이 서원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 1878년(고종 15)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1924년에 중수하고, 1927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노사가 가장 오래 거주하면서 저술활동과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던 곳이다. 일행이 외경심(畏敬心)으로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니 곧바로 ‘고산서원(高山書院)’ 현판(懸板)이 걸린 강당이 보인다.
강당 좌우에는 동재(東齋)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西齋)인 집의재(集義齋)가 서원 양쪽 공간에 대칭을 이루고 우람한 자태로 서있다. 그 담대헌 오른쪽에는 산수유·벚꽃·은행나무들이 풍진(風塵)의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꼿꼿한 선비의 기상처럼 짙푸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 왼쪽 장판각(藏板閣)에는 선생의 문집과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김승희 해설사의 인도(引導)로 일행은 지금은 ‘고산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는 담대헌, 마루에 걸터앉아 해설을 들었다. 거기서 남쪽으로 아련히 무등산이 보이고, 무등산 장망봉(長望峰)에는 노사의 부모님 묘소가 있는데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거기서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며 ‘담대헌’이라는 이름을 걸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노년기의 작품인 ‘담대헌기’에는 그의 간절한 부모님 생각이 은은하게 잘 표현되어 있다.
해설을 들은 후 일행은 합천 출신 노백헌이 배향된 신실(神室)인 고산사(高山祠)에 들려 참배하였다. 신실 주벽(主壁)에는 노사의 위패가 있고 좌우에는 팔위(八位)의 제자들이 배향되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노사학파의 거장들이다. 노문(蘆門) 3대 제자인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등 수제자(首弟子) 세 분에, 노백헌과 가장 친한 친구였던 노사의 손자 기우만(寄宇萬)까지 네 분의 학자가 오른편에 모셔져 있고, 또 다른 네 분의 학자들이 왼편에 노사를 중앙으로 양쪽에 네 분씩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었다.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신호((莘湖) 김녹휴(金錄休), 동오(東塢) 조의곤(曺毅坤)이 그들인데, 모두가 당대에 뛰어난 학자들이었다. 기우만은 합천의 노백서사(老柏書舍)를 여러 차례 찾아와 정재규와 학문을 토론했을 만큼 친한 친구사이이자 학문의 도반이었다.
노사 기정진은 주리론(主理論)에 근거하여 행위와 실천이 없는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학자였다. 자신이 밝혀내고 찾아낸 진리는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그 참뜻이 있다고 믿고, 82년의 평생 동안 가장 겸허하고, 청빈한 학자로서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탐구에만 일생을 바쳐, 참으로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해낸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그는 너무 가난하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가난을 벗어나도록 60세에 내린 고향 근처의 무장(茂長)현감이라는 벼슬도 완곡하게 거절하였고, 산림(山林)의 벼슬인 장령(掌令)이나 집의(執義)는 물론 동부승지나 호조참의 등도 모두 거절하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던 그의 나이 69세이던 병인년에는 병인양요라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난리가 일어났다.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한 소위 ‘병인양요(丙寅洋擾)’ 사건이다. 노사는 이때 곧장 임금에게 ‘병인소(丙寅疏)’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때 조정에서는 화의(和議)를 하자며 전쟁을 피하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때였지만, 노사는 이를 결사반대하고 전쟁을 위한 군비를 강화할 것과,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斥邪論)을 주장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왜란대비 진언과 똑같은 주장이었다. 다행히 당시 조정에서는 노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는 벼슬이 올라 공조참판이라는 고관직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천하에 노사 기정진의 이름을 알린 상소였고, 최초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그러면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맞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한 진정한 성리학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노사(老沙 기정진(奇正鎭)을 들고 있다.
노사의 말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벼슬도 버리고 말없는 청산과 벗하며 청빈하게 살면서 나라에 변이 일어났을 때는 주저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조정에 바른 정치를 종용했다. 77세에는 그의 대표적 논문인 ‘납량사의(納凉私議)’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81세에는 ‘외필(猥筆)’이라는 독특한 유리론의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79세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이 도끼를 들고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도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심경을 노래한 시조한수가 전해진다.
“공명(功名)도 너 하여라, 호걸도 나 싫으며, 문 닫으니 심산(深山)이요 책 펴니 사우(師友)로다. 오라는 곳 없건마는 흥 다하면 갈까 하노라”라는 시조 한 수는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청빈하고, 아름다웠나를 반증해주고 있다. 아무런 미련 없이 아름답게 생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