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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농작물은 주인 발소리 듣고 자란다 – 이호석 논설위원

농촌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부터 “농작물은 주인 발소리 듣고 자란다!”라는 말을 가끔 어른들한테서 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농작물이 어째 주인 발소리 듣고 크노“ 라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예사로 들었다. 나는 군대를 다녀오고 오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은 이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와 올해를 지나면서 이 말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내 집 앞쪽과 뒤편에 손바닥만 한 텃밭 두 떼기가 있다. 뒷밭에는 감나무 세 그루와 사과, 살구나무 등 다섯 그루가 있고, 앞밭에는 자두와 대추나무 한 그루씩이 심겨있다. 남은 공간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가지, 오이, 토마토, 고추, 상추, 파 등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몇 포기씩 심는다. 또 가을배추도 여기서 생산한다. 채소는 거의 자급자족하는 셈이다.
감나무를 비롯한 유실수는 벌써 20여 년이 되어 제법 큰 나무가 되었다. 내가 매년 이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하지만, 서투른 솜씨와 나무에 대한 욕심으로 제대로 자르지를 않아 키가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올해 초 어느 날, 과수원을 경작하면서 내 집 2층에 사는 젊은 사람이 텃밭의 유실수 모습이 딱해 보였던지, 나도 없는 사이에 나무를 시원하게 잘라 놓았다.
이들 나무에서 처음 과일이 열기 시작하고 몇 년은 그런대로 잘 따먹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는 약을 치지 않으면, 봄에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다가도 여름이 되면 거의 다 떨어져 버린다. 이러한 현상이 차츰 심해지더니 지난해는 봄에 그렇게 많이 열렸던 감, 살구, 자두가 모두 다 떨어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다. 너무나 서운하여 덩칫값도 못 하는 유실수를 모두 베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였지만, 지금까지 키운 것이 아까워 그대로 두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 마을에는 집집이 터줏대감처럼 우뚝 서 있는 감나무에 약을 치지 않아도 가을이 되면 누렇게 잘 익은 감들이 온 마을을 치장하며 정겨운 농촌풍경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약을 치지 않으면 아무 과일도 수확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이 자연 오염 탓인지, 아니면 병해충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 몇 년간 부모님 밑에서 농사일을 했다. 그때는 농사에 별 관심도 없이 부모님이 시키는 일이라 억지로 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걸핏하면 “농작물은 주인 발소리 듣고 자란다.”라고 하시면서 게으른 나를 논밭으로 내몰아 풀을 매게 하는 등 일을 시켰다. 그때는 그 말뜻은 대충 알아 들었지만, 그저 나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잔소리로만 들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바쁜 직장 일을 핑계로 텃밭 가꾸는 일은 아내가 도맡아 하였고 나는 아예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텃밭 관리를 내가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 후에도 농사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아 지금도 작은 텃밭 한 떼기 가꾸는 것도 내가 알아서 척척 하는 게 없다. 계절 따라 집 가까운 논밭에서 일하는 이웃 할아버지에게 물어서 하고, 모종을 옮기거나 씨앗을 뿌리는 시기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가 그분이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따라 하기 바쁘다.
집 바로 옆에 있는 텃밭을 비워둘 수가 없어 해마다 채소를 심기는 하지만, 흔히 손을 늦추어 풀밭이 되기 일쑤이다. 어떨 때는 텃밭이 채소밭인지, 잡초밭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도 있다. 이를 때는 두 세력이 서로 주인 행세를 하려고 아귀다툼을 한다. 잡초는 무성하게 나고 자라기도 하지만 생명력이 끈질긴 것도 있다. 쇠비름 같은 잡초는 뽑아놓아도 마음 놓지 못한다. 비를 맞거나 습기가 조금만 있어도 되살아나려고 발버둥 친다. 두세 번 뒤적이며 확인 사살을 해야 겨우 죽는다.
텃밭의 잡초는 수시로 뽑아도 사오일이 지나면 새파랗게 올라온다. 특히, 장마철에는 그 속도가 더 빠르다. 나는 이런 잡초를 보면서 가끔 1950년 6·25동란 때 중공군의 인해전술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전쟁은 북한이 기습 남침하여 며칠 만에 낙동강까지 빼앗겼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잃었든 국토를 되찾고 두만강까지 쳐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다시 밀려 내려오면서, 현재의 휴전선을 경계로 끝난 전쟁이다.
유엔군과 국군이 총탄을 아무리 퍼부어도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후퇴했듯이, 내가 잡초를 아무리 뽑고 죽여도 끈질기게 나는 그 모습에 질리게 된다.
올해는 한마을에 사는 동생에게 부탁하여 텃밭의 유실수에 두 차례 약을 쳤다. 그리고 텃밭 채소도 아침 식전과 해 질 무렵 등 시원한 시간에 자주 나가 돌본다.
이렇게 자주 나가서 많은 관심을 가지다 보니, 가뭄이 계속되어 채소가 시들할 때는 수도꼭지에 호수를 연결하여 물도 주고, 밭골에 난 잡초도 수시로 뽑는다. 또 텃밭 가장자리에서 블록 담장을 기어오르지 못해 낑낑거리고 있는 오이 손이 쉽게 올라가도록 얼게도 만들어 주고, 고추며 가지, 토마토 곁순도 따준다.
올해는 유실수에 약을 두 번이나 쳤고, 채소밭도 자주 손질한 덕분에 과일과 채소, 모두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밭골도 항상 훤하여 보기도 좋다. 이래서 예부터 농촌 어른들이 “농작물은 주인 발소리 듣고 자란다.”라는 말을 노래처럼 부르면서 더 부지런히 농작물을 가꾸도록 한 모양이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비단, 농작물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자식 등 가족들에게 또 모든 사람, 모든 일에 지금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상대하고 알뜰히 챙기면 나의 삶도 조금 더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