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길은 정말 있는 것인가?
박인욱
까페토랑 나비 대표
몇 해 전부터 시작된 인문학이 열풍이다.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그 사람은 결국 나를 발견하고 나를 새롭게 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영리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물어 봐야 한다. “요즘 왜 인문학이 열풍인가?”라고…
첫째는 공학계열과 달리 인문학 계열 출신들이 취업하기 힘든 현실이고 그러한 홀대에서 인간을 탐구하는 기초학문들의 사장을 두려워한 나머지 학문의 형평성 차원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하필 애플의 창업자 스티븐 잡스는 새로운 IT기기의 창조 근원을 인문학을 통해 고안했다고 하여 잡스 따라하기가 한때 봄을 일으켰다.
둘째는 우리들이 더 이상 국가나 사회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록되는 것이다. 정치는 오래 전부터 신뢰를 잃었고 경제는 이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어 이제는 주위의 경제대국들 속에 갇혀버린 듯한 불안한 의식들이 인문학이라는 인간 연구를 통해 개인 스스로의 변화가 이 국가와 사회에 희망의 홀씨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 사회( 또는 국가 )가 노후화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나 사회에 저항하기에는 열정과 의지가 약해졌다는 것이다. 비판과 저항에는 젊은 에너지 집단이 필요하고 또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화 사회를 지나 초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어 그만큼 활력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개개인의 변화가 사회를 변혁시킬 수도 있다지만 국가와 사회시스템 자체가 또 개개인을 변혁을 저지하고 억압할 수 있으며 사회시스템에 맞는 인간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문학과 달리 사회 (또는 국가)를 살아 있는 거대한 유기체로 상정하고 사회시스템이 개개인을 통제하고 의식까지 지배할 수 있다고 보며 그러한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 사회학이다.
7·80년대는 사회학 관련학문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오늘날 인문학처럼 열풍이 몰아쳤다. 미래의 희망을 개개인의 반성이 아닌 사회 (또는 국가 )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그런 사회와 국가를 향한 비판과 투쟁이 활기차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대표적인 저항 세력을 386세대라 부르는데 그들의 투쟁으로 국가 권력에게는 대통령 직선제를 선언하게 했으며 각개각층에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명실공히 ‘인권과 민주주의’ 라는 대의 아래 비판과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386세대의 주목할만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대화와 타협을 모르며 오로지 투쟁만 일삼는 싸움꾼(?)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는데 (정치 집단들이 386 정치 엘리트들을 정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함 ) 그러한 데는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저항 만큼 시대의 흐름에 따른 스스로의 변화와 개혁에는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인문학 열풍도 오로지 ‘나’라는 개인들 자신에게만 문제를 제기하고 그러한 ‘나’라는 존재로 인해 사회에 현상을 발생시켰다는 자책에 몰입하게 된다면 국가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도 끊임없이 자기 반성의 굴레에 가두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국가와 사회가 저지르는 부조리에 대해 우리 스스로의 문제로 치부하여 방종하게 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통한 나 자신의 성찰은 나를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나’가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예견하며 아울러 나의 개혁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 능력을 함께 배양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와 국가에 대한 비판만 있고 ‘나’를 성찰할 수 있는 반성이 없다면 그것은 소위 말하는 투쟁가는 될 수 있을망정 진정한 혁명가는 될 수 없다.
반면에 나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만 있고 사회와 국가를 향한 비판 능력이 없다면 사회가 원하는 ‘착한 사람 ‘은 될 수 있을망정 진정한 개혁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