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인터뷰-“나의 20대는 공부와 번뇌의 청춘이었다”-소리샘 이비인후과의원 이종철 원장(의학박사 전문의)
“내 고향 합천에서만큼은 진실 되고 성실하게 의술을 펼치고 싶습니다”
‘돈의 맛’을 벗어나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합천읍 이화예식장 뒤편에 이비인후과가 개원을 했다. 이비인후과가 필요한 합천으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소식이다. 그것도 합천이 고향인 의사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베이비붐의 가장 절정기에 태어난 58년 개띠생은 중·고등학교를 연합고사로 시험을 치른 세대이며, 대학교에는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로 치른 세대이기도 하다. 또한, 대학에 진학해서는 10.26과 5.18을 겪으며 휴교령과 데모로 이어진 1980년대를 보낸 세대이며, 사회에서는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에게 쫓기는 넥타이부대, 군대에서는 운동권으로 낙인이 찍힌 세대였다. 가까스로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았다가 IMF 사태로 속된 말로 ‘개피를 본’ 세대, 그러한 격변의 시대에 살았던 58년 개띠생 이종철 소리샘 이비인후과의원 원장을 만나 고향으로 돌아와 개원을 한 이유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용석 기자
자신을 소개한다면?
나는 58년 개띠생이다. 합천초(58회)를 나와 부산대신중, 부산남고, 부산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아버님이 진주 무진회사(지금의 상호신용금고) 대표였다. 그래서 당시 집안이 엄청 부자였다. 그러나 회사가 부도나고 한순간에 알거지가 되면서 나의 중학교 시절은 갑자기 비참해지기 시작했다. 의대에 가서도 알바를 해가며 6년간 등록금을 내 손으로 마련했어야 했다. 장학금을 타기 위해 지독하게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의대에 들어간 나는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의 가난했던 학교 시절을 겪으며 사회체제의 모순을 깊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의대를 다니다보니 의료제도에도 모순 투성이었던 것이다. 한국 근세사의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의 20대는 한 마디로 공부와 번뇌 속에서 살았던 청춘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까닭은?
의학분업이 일어나면서 의료제도의 모순점에 봉착했다.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혁명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네팔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생각해봤지만 과연 내가 모질게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귀촌이었다. 의료활동은 봉사로 고향에서 하고 주업은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병에 수백만평의 땅을 사서 호두나무 등을 심고 복합영농조림사업을 펼쳐보고 싶었다. 시골에 쓸모없는 나무가 너무 많기에 ‘나무 메카’의 꿈을 고향에서 실현시켜 보고 싶었다. 그러나 부지 확보나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생각한 게 고향에 집을 짓고 시골에 사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의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집짓는 공부를 했다. 틈틈이라기 보다는 의료 활동 외에는 인터넷을 통해 독학으로 집짓기 공부에 몰두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5년 동안 농업공부와 집짓기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선 매주 대병으로 와 조금씩 지금의 집을 지었다. 토요일 오후 1시에 병원문을 닫고 출발하면 3시반에 합천에 도착했다. 물론 처남이나 친동생, 사촌동생, 와이프, 고향 친구들이 거들어주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혼자 나만의 집을 지어나갔다. 내가 본래 ‘무엇을 하든 반드시 생각한 바를 이루어내야 한다’라는 집념이 강하다. 그렇게 했더니 4년만에 대병에 집이 지어지더라
귀촌을 결심한 동기는?
전문의로 군복무를 마치고 울산해성병원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2년간 근무를 했다. 돌이켜보면 가르치고, 수술하고, 연구하던 이때가 가장 보람되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고신대 의대교수로 초빙되었다가 그마저 내던지고 결국은 울산에서 병원문을 열었다.
그런데, 개업하자마자 후회가 막심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시집살이보다 더 어렵고 외로운 레지던트 생활을 거치며 다다른 곳에서 뻔할 뻔자의 진료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겨우 이 짓하려고 이리 공부를 했나?’ 하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왔다. ‘과연 내 인생살이가 과연 이게 다인가?’ 하는 자괴감이 날 참 힘들게 했다.
울산에서 병원을 열고 하루에 300명이 넘는 환자를 봤다. 매일매일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혀가 굳을 정도다. 의사가 돈을 많이 벌 때는 피와 땀을 절여서 버는 돈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정말 사실이다. 그렇다면 ‘돈의 맛’에라도 빠져 살아야 하는데 내 성향상 그러지를 못한다. 들어오는 돈을 움켜잡으려는 속성이 강해야 힘들어도 살맛이 날 텐데 살맛이 전혀 안 났다. 게다가 타향이라 정도 들지 않았다. 결국 부산으로 병원을 옮겼다.
주변에서 다들 미쳤다고 했다. 그 잘나가는 병원을 두고 부산으로 떠난다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내게 부산은 중학교 때부터 살았던 곳이라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울산에서 5년, 부산에서 20년을 의사로 살았다. 부산에서 개업한 지 5년이 지나자 잠자고 있던 귀촌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 이후로 다시 5년, 귀촌을 굳게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귀촌에 대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진료 시간 외에는 오로지 농업공부와 집짓기 공부에만 몰두했으니 말이다. 내가 나를 봐도 한 가지 목표가 설정되면 두 말 없이 그 길만을 오롯이 가는 근성이 있는 것 같다. 버리지 않고는 온전한 새 길을 갈 수 없지 않는가?
한국의료제도의 병폐는?
한국의 의료제도는 잘못됐다. 우리나라 저수가 정책은 작은 재정을 가지고 국민에게 혜택을 많이 주려고 하니 올바르고 성실히 의료행위 하는 의사는 부당한 대우를 받기가 십상이다. 정부가 파이를 주고 너네끼리 뜯어 먹어라는 식이다. 원칙대로 하면 파이를 적게 가져가고, 사기를 치면 많이 가져가는 구조를 정부가 만들어 놓은 격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꼴이다. 의사집단을 가장 잘 지배한 정부로 우리나라가 세계 1위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파이가 커서 의사 자존심대로 진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쓸데없는 치료를 남발하는 추세다. 게다가 CT나 MRI 촬영 등 환자들이 기계를 더 신뢰하고 요구한다. 지금은 환자가 갑이고 의사가 을이다. 예를 들어 주사를 맞지 않아도 될 상황인데도 주사를 놔달라고 고집을 피운다. 말려도 소용없다. 환자들이 전문가 의사의 권위를 인정해 줘야 하는데 근본적으로 신뢰가 없다. 유럽은 감기환자가 오면 레몬차를 권하는데, 한국은 약을 과하게 써서 빨리 낫게 해줘야 용한 의사라는 말을 듣는다. 국민성과 맞아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폐해는 수 십 년 뒤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제는 환자를 보면 관상부터 봐야 한다. ‘저 환자에게 빨리 낫도록 무리한 처방을 해야 하나, 원칙대로 진료해야 하나’ 하고 말이다. 이러한 현실도 함부로 의사와 환자를 나무랄 수만은 없는 문제다. 이것은 의료계의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불합리한 의료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생한 문제이다.
건강하게 사는 방법은?
그 사람의 식습관, 생활습관만 봐도 병의 조짐이 다 보인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건강을 잃은 후에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건강을 너무 염려해도 안 된다. 병에 관해 노이로제가 걸리면 그것 자체가 끝없는 근심을 낳는다. 여기에는 중용의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너무 의료낭비가 심하다. 환자는 의사보다 기계를 더 신뢰한다. 의사들이 고가의 의료기계를 조장하고, 환자들이 최고의 장비를 선호하는 게 맞물린 까닭이다. 내가 보기에는 자기를 맡길 수 있는 주치의제도가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믿을 수 있는 의사 한명을 가지는 게 제일 좋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어디가 아프더라도 주치의에게 상담하여 방향을 잡는 게 좋다. 이를 위해서는 의사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있어야 한다. 의사와 환자 서로간에 신뢰가 깨지면 어렵기 때문이다.
마지막 당부의 말은?
내가 의대생일 때 체제에 불응하여 데모에 뛰어들어 고문까지 당했던 어느 선배를 7년 전 우연히 만났다. 몹시 가난하게 사는 그를 보며 지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억지로 손에 쥐어드렸다. 불합리한 체제에 순응하고 산 나는 그에게 깊은 부채의식을 느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 선배는 1년 뒤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한국 귀수술의 대가이며 한국 이비인후과의 태두이신 나의 은사 이종담 선생님에게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했더니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내게 말씀하셨다. 평소 선생님은 주변분에게 “종철이가 돈을 자꾸 멀리해서 걱정”이라고 말씀하셨던 분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대학생일 때부터 인생에 돈이 가지는 의미를 끝없이 고민해 왔다. 그 결론을 내린 내 뜻을 선생님이 알아주신 것 같아 참으로 고마웠다.
합천 대병에 내려와서도 병원 개업을 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료봉사 정도만 활동하려고 했었는데 고향 친구가 대뜸 “합천군민들도 이비인후과 의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고향에 내려왔으니 고향을 위해 무언가를 하자’고 말이다.
나는 고향에서 내가 가진 실력과 지식으로 교과서적인 진료를 할 것이다. 고향분들이 알아주시면 고맙고, 못 알아주신다 해도 할 수 없다. 내 고향 합천에서만큼은 진실 되고 성실하게 의술을 펼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바르고 정의로운 사회를 꿈꾼다. 최소한 살아생전은 아닐지언정 아이들에게만큼은 그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정도(正道)를 갈 것이다.” /이용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