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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어느 찻잔 이야기 – 소민호 동화작가

지금 나는 하늘을 날 만큼 행복해. 따뜻한 두 손 안에서 뜨거운 차를 품고 있거든.
“음, 좋다!”
“뭐가요? 차 맛, 아니면 찻잔……?”
마주 앉은 할머니가 웃음기 머금은 그윽한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건너다보았어.
“둘 다……. 껄껄껄……!”
할아버지는 나를 두 손으로 감싼 채 할머니를 보고 활짝 웃었어.
오랫동안 두 분 입가에 번지는 잔잔한 웃음이 행복을 말해주었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행복한 만큼 내 짝꿍과 나도 행복해.
며칠 전이었어. 나는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졌어. 빈 종이상자들과 함께 나도 종이 상자에 담긴 채 버려진 거야.
나를 버린 사람은 나를 한 번도 상자에서 꺼내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는 나를 만든 청년의 곁을 떠난 뒤 세상 구경을 못한 채 버려진 거야. 얼마나 끔찍했겠어?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땅속에 흙으로 있을 때가 그리워졌어. 그냥 흙으로 있었으면 나무뿌리라도 어루만지고 걱정 없이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 나를 세상으로 꺼낸 청년을 원망하면서 말이야.
땅속은 늘 변함이 없고 조용했어. 그런 땅속에서 차분하게 지내던 나는 어느 날 누군가의 괭이질에 의해 한 덩이의 흙으로 세상에 나왔어. 처음 대하는 밝은 햇빛이 눈부셔서 눈을 꼬옥 감았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어디론가 옮겨졌어. 거기는 나와 비슷한 흙들이 많이 쌓여 있었어.
얼마 뒤 나는 다른 흙과 섞여 발에 밟히고 다져져서 차지고 진득한 흙덩이가 되었어.
“이만하면 됐지?”
나이 많은 아저씨가 청년을 돌아보자, 앞치마를 두른 청년이 다가왔어.
“됐어요.”
청년은 내가 섞인 흙덩이를 조몰락조몰락 주무르더니 뱅글뱅글 돌아가는 물레에 올렸어. 어지러웠어.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로 바뀌는 거야.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온통 뒤죽박죽되어 버렸어. 속이 울렁거리고 몇 천 년 전에 마신 물도 다 토해낼 것 같았어.
다행인 건 물레 앞에 앉은 청년이 두 손으로 나를 감싸는 바람에 그나마 중심을 잡을 수 있었지. 아무튼 나는 돌아가는 세상을 처음 본 거야. 오죽했으면 세상을 살아가려면 정신 줄을 꼭 붙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아 그런데 이건 또 뭐야!
눈을 떠 보니 나는 예쁜 그릇이 되어 있었어. 다른 동무들과 시렁에 올라 앉아 편안하게 몸을 말리고 있었거든. 우리는 그 동안 힘들었던 보람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때를 기다렸어. 흙으로 있다가 이렇게 예쁜 그릇이 되는 건 누가 봐도 괜찮은 변신이잖아.
그때부터 나에겐 꿈이 생긴 거야. 흙으로 있을 때는 뭐가 뭔지도 몰랐지만, 이렇게 그릇이 되니까 내 몸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렸어. 알고 보니 그게 바로 꿈이었던 거지.
무슨 꿈이었냐고?
킥킥, 그리 큰 꿈은 아니었어. 누군가에게 맛있는 음식을 담아 주는 일, 바로 행복을 선사하는 일을 하는 예쁜 그릇이 되고 싶었지.
에잉, 내 꿈 이야기를 듣고 눈 흘기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왜, 내 꿈이 시시해? 아니면 너무 커? 크든 작든 꿈이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그렇게 우리는 몸을 말렸다가 이상한 물에 목욕을 하고 다시 말린 뒤 토굴 속에 들어간 거야. 어둡고 답답했어. 무섭기도 했고.
그래도 지금까지 힘든 과정을 거쳤으니 크게 힘든 건 없을 거라 생각했지. 아, 그런데 웬 걸. 죽기보다 더 힘든 일이 우리를 기다렸던 거야.
“작은 구멍도 다 막으세요.”
청년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토굴 입구와 옆구리에 난 구멍을 모두 막으라고 말했어. 다만 입구 아래쪽은 막지 않고 큰 구멍 그대로 남겨 두었어.
그런 다음 큰 구멍에다가 불을 지피는 거야. 빨간 악마의 혀를 닮은 불꽃이 휘르륵 휘르륵 춤을 추면서 토굴 안을 휘젓고 다녔어. 우리도 함께 휘감으면서 말이야. 우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기절을 하고 말았어.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 눈을 떠 보니 아직도 토굴 속이었어. 다행히 불은 없었지만 뜨거운 기운이 남아 우리를 힘들게 했어. 그래도 기절할 만큼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우리는 천천히 식어가는 토굴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어. 그때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었었던 거야.
“가마 안이 다 식었습니다.”
“이번에는 불꽃도 아름다웠어.”
사람들이 웅성거렸지.
우리는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좋아했어.
드디어 가마 입구를 막았던 돌과 흙이 무너지고 빛이 들어왔어.
“아, 참 좋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어. 많이는 안 봤지만 여태껏 본 햇빛 가운데 제일 아름다웠던 것 같았어.
“잘 나왔구먼!”
“흙이 좋아서 잘 나온 것 같아요.”
“그럼 모든 게 적당하게 맞으니까 이런 물건들이 만들어지는 거지!”
“역시 자네 솜씨는 뛰어나!”
청년을 향한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았어. 눈이 부셨어.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어. 청록색 찻잔들이 작은 몸을 맞대고 가지런히 모여 빛을 내는 바람에 눈이 더욱 부셨던 거야.
우리는 청년에게 고마워하며 세상을 다 담을 듯이 하늘을 쳐다보고 소리 없이 환호를 했지.
우리는 두 개씩 짝을 지어 작은 종이상자에 담겼어,
“좋은 주인 만나서 제 모습 찾으면 좋겠다.”
청년은 우리를 살살 쓰다듬었어.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듯했지.
‘제 모습……?’
‘이게 우리 모습이잖아.’
우리는 청년의 말을 되뇌면서 차를 타고 어느 가게에 도착했어.
“깨끗하게 잘 나왔군!”
주인은 만족해하면서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우리를 펼쳐 놓았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지.
“이거 한 세트 주세요.”
자리 잡은 지 하루도 안 돼서 말끔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가게에 들어섰어. 우리를 가리키면서 말이야.
“선물하실 건가요?”
가게 주인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손님맞이를 했어.
“예, 포장해 주세요.”
“예쁘게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가게 주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짝꿍과 내가 든 상자를 포장해서 손님에게 내밀었어.
그렇게 한참 동안 자동차를 타고 간 곳은 어느 노부부가 사는 집이었지.
“선생님, 건강은 어떻습니까?”
“허허, 그냥 저냥 지내고 있네!”
“선생님, 차를 좋아하셔서 차와 찻잔을 가지고 왔습니다.”
“음, 찻잔은 많은데……, 어쨌든 고맙네.”
선생님이라는 노인은 우리가 든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았어. 우리는 조금 서운했어. 아마 선물한 사람도 우리처럼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거야.
며칠 지난 어느 날 노부부가 집 정리를 했어. 오래 되고 낡은 것들을 들어냈어. 잘 쓰지 않는 물건들과 함께 우리도 큰 상자 속으로 들어갔지.
우리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만 듣고 그렇게 쓰레기로 버려진 거야. 이러니 얼마나 어이없고 끔찍했겠어.
‘내가 꾼 꿈은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작은 상자 안에서 소리쳤어. 물론 사람들은 들을 수 없지만 내 짝꿍은 귀를 막았지.
‘이렇게 소리친다고 뭐가 달라져. 그냥 운명에 맡기자.’
짝꿍은 모든 걸 내려놓은 듯했어.
하지만 나는 너무 억울했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그렇게 큰 고통을 참으면서 붙잡은 꿈을 버릴 수는 없었어.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방법도 없었지만……!
짝꿍은 더 말하지 않았어.
나도 너무 힘이 빠져 상자에 그냥 몸을 맡겼어
그 때였어.
누군가가 종이상자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어. 빠른 손놀림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정리를 하는 손길이 왠지 꼼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지.
“어허, 이건 또 뭔가?”
종이상자를 정리하던 손길이 우리가 든 상자를 열었어. 햇살에 눈이 부셔 실눈을 뜨고 쳐다보았어.
‘앗, 또 할아버지야!’
‘아까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 아니야?’
‘우리를 보고 놀라는 걸 봐서 아닌 것 같아!’
‘가슴에 경비라는 글씨가 붙어 있 걸 봐서……?’
둘이서 이야기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우리를 꺼내 만져보고 살펴보았어.
“오호, 새 것이구먼!”
우리는 그렇게 할아버지 집에 오게 된 거야. 넓고 큰 집은 아니어도 책이 많은 집이었어. 아마 책을 많이 읽으시나 봐. 식탁 위에 찻잔과 주전자가 있는 걸 봐서 차도 좋아하시는 것 같고.
할아버지는 우리를 깨끗이 씻은 뒤 주전자에 차를 우려서 우리에게 따랐어. 따끈따끈한 차가 쪼르르륵 소리를 내며 내 안에 채워질 때는 맑은 세상을 한가득 담는 기분이었어. 따뜻한 세상 말이야.
할아버지는 차가 찰랑거리는 내 짝꿍을 마주 앉은 할머니 앞에 갖다 놨어. 그런 다음 나를 당겨 두 손으로 감쌌어. 두툼하고 주름진 손이 참 포근했어.
“음, 좋구먼!”
할아버지가 눈을 감고 차향을 맡았어.
“뭐가 그리 좋아요?”
할머니가 그윽한 눈길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어.
“다!”
할아버지는 활짝 웃으며 할머니를 바라보았어.
그렇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지.
‘찻잔이 된 게 참 다행이야!’
짝꿍이 청록색 눈빛으로 말했어.
‘이게 청년이 말한 우리의 모습이었어!’
나는 차와 할아버지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