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긴 의자의 추억-소민호 동화작가
세월이 켜켜이 쌓인 공원 구석진 곳에 낡은 긴 의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는 공원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두터웠습니다. 녹 슨 쇠다리에 엉덩받이로 올려놓은 각진 나무들은 군데군데 갈라지고 부서져 있었습니다.
“이런 날은 누구든 그림자만 비춰줘도 마음이 따뜻해지겠는데……!”
긴 의자는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노을빛 조각들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음, 그 때 일이 이제는 안개 속 물너울처럼 가물가물하네.”
의자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낡은 책갈피 넘기듯 살며시 펼쳤습니다. 낙엽이 흩날리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눈이 큰 소년과 할머니가 지는 해를 마주하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할머니는 산책길에 가끔 쉬어가곤 했지만 소년은 처음이었습니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이 할미랑 그냥 그렇게 살자!” 할머니는 무심한 듯 짙은 놀빛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소년은 대답대신 큰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나이답지 않게 차분했지만 눈동자가 많이 흔들렸습니다. 큰 눈 속엔 두려움도 가득했습니다. 다음 날이었습니다. “어제 할머니랑 왔던 그 아이가 밤새도록 울었어!”
의자의 오랜 친구 작은 바람이 속삭였습니다. 작은 바람은 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의자에게 시시콜콜 알려주는 소식통이었습니다.
“왜 울었을까?”
“어제 아침 일찍 걔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할머니를 찾아 온 거야.”
할머니 집에 들어선 엄마는 할머니 손에 소년의 손을 물건 넘기듯 쥐어 주고는 바람처럼 가버렸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엉겁결에 아무 말도 못하고 멀어지는 소년의 엄마 등만 바라보았답니다.
“모진 것……!” 할머니는 한참 만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듯 소년을 꼭 안아주었답니다. 소년도 할머니 품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고 했습니다.
바람의 말을 들은 의자는 어제 본 소년의 눈이 떠올랐습니다. 놀란 듯, 슬픈 듯 껌벅이는 큰 눈이 자꾸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 뒤로 소년은 가끔 혼자 다녀갈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랑 함께 의자에 앉았다가 가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두 사람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앉아서 먼 산만 바라보다가 가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소년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할머니, 제가 대학교에 다니면 집에 자주 못 올 텐데 괜찮겠어요?”
“편안하게 잘 지낼 테니 걱정하지 마라!” 말은 그래도 눈가는 빨갰습니다. 금세라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아이, 아니 이제 청년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어제 떠났어.”
작은 바람이 의자를 흔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때?” “하루 종일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어, 손자가 떠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바람도 젖은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렇게 또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잠깐씩 다녀가던 청년이 된 소년의 발길이 언제부턴가 뚝 끊겼습니다.
할머니도 어디론가 떠나고 집이 텅 비었다고 바람이 말했습니다. 의자에게는 처음으로 그리움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도 공원 들머리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가 하면, 어떤 날은 온몸이 빨갛도록 짙은 놀빛에 흠뻑 젖기도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의자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우울한 마음만큼 의자도 많이 낡았습니다.
엉덩받이는 금이 가고 작은 틈이 생기더니 빗물과 햇살, 더위와 추위에 그 틈은 더 크게 벌어졌습니다. 곳곳에 허연 가루가 푸슬푸슬 흘러내렸습니다. 좀벌레가 파낸 나무 가루였습니다.
“이 의자는 없애야겠어.” “쯧쯧, 너무 낡았어.” 공원을 둘러보던 주민센터 공무원들이 혀를 찼습니다. 의자는 힘이 더 빠졌습니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쓸모없는 몰골이었습니다.
“그래. 이렇게 더 오래 있으면 땔감으로도 쓸 수 없는 신세가 되겠어.”
의자는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그리움도 추억도 이제는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무더위가 며칠 계속 되더니 바람이 세차게 불었습니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작은 나무들은 금세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습니다. 낙엽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멀리까지 날아갔습니다.
작은 바람은 얼씬도 못하고 바위틈새 꼭꼭 숨었습니다. 의자 위에도 낙엽과 작은 나뭇가지들이 쌓였다가 날아가곤 했습니다.
큰 바람은 다음날까지 공원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멀쩡하던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날아가고, 늙은 나무 몇몇 그루는 뿌리째 뽑혀 쓰러졌습니다.
“어휴, 태풍은 정말 무서워!”
큰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 작은 바람이 살랑살랑 찾아왔습니다.
“여기 좀 쓸어줄래?”
의자는 엉덩받이가 너무 지저분하다고 바람을 보고 말했습니다.
“힘 좀 써야겠는 걸!”
작은 바람은 온 힘을 다해 나뭇잎과 잔가지들을 쓸어냈습니다. 큰 바람이 저질러 놓은 것들을 치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이게 뭐지?”
의자는 엉덩받이 뒤쪽 모서리를 가리켰습니다. 갈라진 틈새에 자잘한 가시가 송송 돋은 젓가락만한 나뭇가지 하나가 꽂혀 있었습니다. 이파리 몇 닢과 껍질이 그대로인 걸 보면 큰 바람에 꺾인 게 분명했습니다.
“초피나무 가지에 번데기가 붙어있어!”
의자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번데기를 가리켰습니다. 꽁지는 가지에 붙이고 몸은 거미줄 같은 줄로 가지에 묶은 채 버텼습니다.
“다행히 큰 바람에도 날려가지 않았구나.” “무슨 번데기인지는 모르지만 잘 견뎠네!”
바람과 의자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습니다.
“어떡하지?” “그대로 두는 게 좋겠어.” 의자는 낙엽으로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자고 했고, 작은 바람은 의자 생각대로 몸을 살짝살짝 뒤척이며 넓은 낙엽 한 장을 들어다가 뾰족한 가시에 걸었습니다.
번데기 몸에 시원한 그늘이 생겼습니다.
“휴-, 괜찮을지 모르겠다.”
“따가운 햇볕을 쬐는 것보다 낫겠지.” 바람과 의자는 비바람이 몰아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은 가지를 보살폈습니다. 한낮 햇살은 따가웠지만 며칠 새 아침저녁 바람은 제법 선선한 가을 냄새를 품고 있었습니다.
“꼼짝도 않던 번데기가 움직여!”
의자와 바람은 꼬무락거리는 번데기를 지켜보았습니다. 등이 갈라지고 몸부림을 치는 모습이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한참 만에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기지개를 켰습니다.
예쁜 생명 하나가 가시 돋은 초피나무 가지를 디디고 아직 마르지 않은 오글오글한 날개를 펼쳤습니다.
“아, 호랑나비다!” 의자가 환호했습니다. 작은 바람이 너울너울 춤을 췄습니다. 호랑나비도 간당간당 흔들며 날개를 말렸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공원 들머리에서 아이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오랜만에 사람 구경을……, 아니야. 아이는 호랑나비를 그냥 두지 않을 거야!”
긴 의자는 반가우면서도 호랑나비를 해코지를 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의자는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하필 이때 올 게 뭐람!” 의자가 아이를 막아보라고 했지만 바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아빠가 어렸을 때 앉아 놀던 의자야.” 예닐곱 살쯤 된 남자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아빠 옆에 서서 의자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아빠가 슬픈 눈으로 말했던 그 의자……?” 아이는 말을 하다 말고 아빠를 쳐다봤습니다.
“응, 그때는 노을빛에 젖은 채 이 의자에 앉아서 하루를 돌아보았지!”
“아빠, 의자가 너무 낡았어요.”
“그만큼 추억도 많을 거야.”
아이 엄마가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아이는 옛날 어느 한 소년처럼 큰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때 여기서 보는 놀빛은 가슴 짠하게 아름다웠지.”
아빠의 손짓에 아이와 엄마도 옆에 앉았습니다. 의자는 오랜만에 한 가족을 맞이하며 사람의 온기를 느꼈습니다. 아빠는 노을빛을 바라보면서 아들에게 지난날을 들려주었습니다.
한참동안 이야기 속에 빠져든 의자와 작은 바람의 가슴이 갑자기 울렁거렸습니다.
“음, 처음부터 느낌이 달랐어!”
의자의 목소리는 들떠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아이도 꼭 닮았어!”
작은 바람의 목소리도 떨렸습니다.
의자와 바람은 어떻게 반겨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아, 호랑나비다!” 세 사람은 팔랑팔랑 날아오른 호랑나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며칠 뒤 지난번에 왔던 주민센터 사람들이 다시 왔습니다.
“그 사람 말대로 엉덩받이만 갈면 되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작은 바람은 살랑살랑 춤을 췄습니다.
“그 사람……? 허허, 다음에는 편안하게 쉬었다 갈 수 있겠어!”
긴 의자는 작은 바람을 보고 행복하게 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