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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암산 아리랑 (2) –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

다음 해 나는 H 중학에서 3년 만에 처음으로 K 고교에 합격하여 전교적인 축하를 받았다. 우리 학년에서 진주에 있는 J 사범과 대구에 있는 D 상고에도 합격자가 나와 최근 10년 사이에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순희도 J 사범학교를 갈 수 있는 실력이 있었지만 응시조차 하지 못했다. 입학원서를 쓰던 날 순희는 수업이 끝나고도 교실에 남아 해가 질 때까지 울었다.
우리는 졸업을 앞두고 3년간의 추억을 글로 쓰는「앙케이트」라는 이름의 노트를 서로 돌렸다. 순희는 내 앙케이트 노트에 함벽루 풍경을 그리고 아래에「즐겁게 영어 자습하던 함벽루! 축구하고 남정강에서 연어 잡던 체육시간! 함께 노래 부르던 해인사의 밤! 우리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나랴?」라고 적었다. 우리는 3월 마지막 주 월요일 졸업식을 마치고 교실에 돌아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으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20명 정도였기 때문에 그 아쉬움에 이별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도회지에 진학한 사람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었고 나머지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농고를 갔다.
1961년 나는 부산에 가서 자취를 하고 시간제 가정교사를 하며 K 고교를 다녔다. 농촌 출신들은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촌티가 났고, 말투도 부산 억양과 다른 사투리를 사용하여 촌놈 취급당하기가 일쑤였다. 체육 시간 번호를 부를 때 나는 ‘스물’을 고향 말투로 ‘시물’이라고 소리 질렀는데 그때부터 ‘시물’은 별명이 되었다.
첫 여름방학 때 귀향해서 광복절을 맞아 중학교에서 열린 기념식에 갔다. 시골 학생들은 고향에 있는 학교 기념식에 참석하고 참가증을 받아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명문 K 고교의 파란 교복 윗도리에 팔각 별 모양의 명찰을 단 나를 보고 모두 부러워했다. 그날 나는 부산에서 편지로 약속한 대로 기념식을 마치고 함벽루에서 순희를 만났다. 부산 이야기를 하며 강변을 걸었는데 순희가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어머니 위패를 모신 연호사 법당에 온다고 했다. 그날 나는 순희에게서 지금까지와 다른 성숙함을 느꼈다.
나는 여름방학을 마치고 부산에 돌아와 2학기부터 담임 선생님의 소개로 국민학교 6학년과 4학년 형제를 입주하여 가르치게 되었다. 서대신동 부자 동네의 택시회사 사장 집이었는데 중학 입시를 준비하는 국민학교 6학년 위주로 가르쳤다. 침식을 하면서 매달 받는 500원 월급은 학비를 내고 용돈 정도는 남았다. 밤에는 개집에 개를 잡아넣고 대문을 잠그는 일과 아침에는 마당을 쓰는 일도 했다. 중학 입시를 앞두고 그해 겨울방학은 고향에도 가지 못했다. 순희는 그해 겨울 함벽루에 눈이 쌓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혼자 보는 것이 아까웠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다음 해 6학년생이 명문 K 중학교에 합격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고2가 되어서 담임 선생님의 소개로 중학교 2학년 남자 학생을 맡았는데 입주할 때 20등에서 5등까지 올린다는 약속을 하고 들어갔다. 10등까지는 올랐으나 더 이상 오르지 않아 나는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나의 답답한 처지를 적은 편지를 순희에게 보냈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그 집을 나왔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1년 만에 순희를 만났다. 농사일에 그을린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흘렀다. 함벽루에 앉아 가정교사 얘기를 하다가 해가 저물었다. 강변길을 걸을 때 달빛이 강물을 비추고 있었다. 순희 동네로 가는 나무다리를 건너 땅고개를 걸었다. 달빛 아래 박꽃이 가득 덮인 초가지붕이 보였다. 싸리나무로 엮은 울타리 넘어 희미한 불빛이 봉창으로 흘러나왔다. 걸음을 멈추고 보름달 아래 하얗게 핀 박꽃을 한참 보던 순희가 말했다.
“나 저 하얀 박꽃으로 살고 싶어.”
보름달 빛이 낮같이 박꽃에 내리고 있었다.
“하늘엔 보름달이 비추고 지붕 아래엔 엄마의 손길이 있는 집의 저 박꽃으로 살 수 없을까?”
나는 순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날 밤에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지난 겨울방학 때 가정교사 일로 고향에 오지 못하는 1년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내가 부산에 온 후에 한 달에 두 번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순희는 J 사범학교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해 아픈 마음을 자주 드러냈고 초하루와 보름에 연호사에 어머니를 찾아갔던 얘기를 여러 번 썼다. 순희를 새미실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보름달이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또 담임 선생님께 부탁하기가 미안해 가정교사를 하는 친구를 통해 자리를 알아보았으나 자리를 찾지 못했다. 학교에서 한 시간 이상 멀리 떨어진 서면에 있는 이모 집에 들어가 통학하였다. 방 두 칸에 여섯 식구가 사는 이모 집에 얹혀 지내는 것이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소개하는 P 여중 2학년생을 가르치게 되었으나 이유도 모른 채 한 달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사춘기 여학생의 변덕이었던 것 같았다. 다시 가정교사를 알아보았으나 찾지를 못했다. 나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하숙집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할 때까지 비벼보기로 했다. 친구의 밥을 나누어 먹으며 지낸 지 한 주일이 지나자, 그것도 미안해 아침에 혼자 일찍 하숙집을 나와 구멍가게에서 빵 한 개를 사 먹고 등교했다. 점심때는 구내식당에서 친구 도시락을 나누어 먹고 저녁에는 공설운동장 담벼락에 붙은 천막 가게에서 풀빵을 사 먹었다. 그렇게 지낸 지 한 달이 되던 어떤 밤에 나는 친구와 풀빵을 파는 그 가게에서 소주를 마셨다. 시골에서 막걸리는 몇 번 마셔 보았지만 소주는 처음이었다. 머리가 돌고 어지러웠다. 술에 취한 세상은 새로웠고 인생을 억지로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있고 잠자리가 있고 부모 형제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처음 알았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K 고교의 상징 원형교사가 내려다보이는 뒷산 잔디밭에 올랐다.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내렸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다. 나는 가정교사를 할 때 주말에 주인집 식구들이 외출하면 책장에 비치된 문학전집에서 처음으로 소설을 꺼내 읽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타인벡의「분노는 포도처럼」은 평생 처음 읽은 소설이었다. 그의「울적한 겨울」은 가정교사를 하는 나의 울적함이 되었고 저항이 되었다. 전깃불도 없는 산골에서 소설책 같은 문화재는 아예 없었기 때문에 부산에 와서 나의 가장 큰 발견은 소설이었다. 나에게 다리 뻗을 작은 공간도 없는 부산에서 나의 탈출구는 소설이었다. 스타인벡이 중졸-뒤에 대학 중퇴의 오보였음을 알았음-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나는 고교 중퇴만 해도 학력에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생물 시간이었다. 생물은 내가 가려던 S 법대와는 관련도 없고 허기도 밀려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옆 친구가 깨워 눈을 떠보니 우리 반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나오라고 했다. 왜 그렇게 자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어제 술을 마신 것도, 점심을 먹지 못한 것도 그리고 잠잘 곳도 없는 형편도 말할 수 없었다.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니 긴 출석부로 머리를 쳤다. 이유를 대라고 다그쳤지만 할 말이 없었다. 뺨을 쳤다. 양 뺨을 두 번이나 쳐도 말이 없으니 주먹으로 갈겼다. 눈이 핑 돌았다. 코피가 교복 앞을 적시었다. 선생님도 너무 했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나는 선생님의 얼굴을 노려보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생물 수업이 끝나자 나는 책가방을 챙겨 학교를 나왔다. 학교 아래 공설운동장에 들어가 플라타너스 아래 벤치에 앉았다. 갈 곳도 없고 할 것도 없었다. 중졸로 노벨상을 받은 스타인벡을 생각했다. 하얀 박꽃으로 살고 싶다던 고향의 순희를 생각했다. 이제 어딘가에라도 떠나자!
어둠이 내릴 때 공설운동장 윗길에 있는 담임 선생님 집에 찾아가 학교를 그만두고 소설가의 길을 가겠다고 했다. 선생님은 선뜻 그러라고 하셨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했다. 학교를 그만두지는 말고 휴학해서 소설 공부를 하라고 했다. 스스로 평가해서 소설가 자질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며 소설 한 편을 써서 국어를 담당하셨던 자기에게 보내면 평가해 주겠다고 했다. 끝으로 선생님은 공부가 소설보다 쉽다는 것을 알라고 했다. 공부는 동기들과 경쟁하면 되지만 소설은 선후배 모두와 경쟁해야 하는 것을 알라고 했다.
그날 밤, 친구 하숙방에서 잠 못 이루고 생각한 끝에 나는 소설가의 길을 걷기로 하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자퇴 원서를 냈다. 이렇게 나의 K 고교 생활은 2년이 되기 전에 막을 내렸다.
큰 보따리에 싼 짐을 어깨에 메고 친구 하숙집을 나와 자갈치 시장 버스 종점에 가서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침나절에 탄 버스는 마산 차부에서 한 시간을 정차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손을 들면 모두 태우고 내려주고 하면서 7시간을 흙먼지 피우며 달려 해 질 녘에 고향 마을 하니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짐 보따리를 둘러메고 들길을 걸었다. 우리 동네에 들어섰을 때 아버지는 논에서 나락을 베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머리로 꾸뻑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갔다. 방학도 아닌데 내려왔으니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하던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해가 지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와 사랑채에서 함께 저녁상에 앉았다. 아버지는 내가 농사지으며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농촌 부모들의 소원은 제발 자식만은 뼈 빠지게 농사지어도 겨우 먹고사는 농군은 면하게 하는 것인데, 부산의 명문 K 고교를 들어갔다고 자랑하던 자식이 농사짓는다고 돌아왔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를 울게 한 불효가 마음 아팠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학비를 대지 못한 아버지의 회한과 하늘과 땅이 맞붙어 숨 쉴 공간도 없었던 아들의 아픔은 그날 밤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취하도록 막걸리를 마시게 했다.
고향에 돌아온 다음 날 나는 중학교에 다니는 사촌 여동생 편에 순희에게 보내는 쪽지를 같은 반의 순희 여동생을 통해 보냈다. 순희와는 그동안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나의 낙향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쪽지를 보낸 다음 날 토요일 오후 함벽루에 갔다. 먼저 와 난간에 앉아 있는 순희가 나를 보자 놀라는 얼굴이었다.
“우째 된기고?”
“차차 얘기할게.”
“학교는 안가도 되나?”
“그래. 설명이 길어.”
“무슨 일이 생깄는데?”
”말로 하기가 어렵네. 가정교사도 잘 안 구해지고 잠자리 찾기도 어려웠어. 부산에는 더 비빌 곳이 없었어.“
“학교는 그만두었다는 말이가?”
“그만두었어. 선생님은 소설보다 공부가 쉽다고 하시면서 마음이 바뀌면 돌아오라고는 했어.”
“그래도 그렇게 힘들게 합격한 K 고를….”
“있을 만한 친척집도 없고. 마지막에는 친구 하숙집에서 잠을 자면서 아침밥은 숟가락 하나 더 얻어 나누어 먹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풀빵을 사 먹으며 지냈는데 한 달이 지나도 가정교사 자리가 구해지지 않았어. 친구 하숙집 주인 눈치도 보이고. 길이 없었어.”
나는 순희를 따라 그의 어머니의 위패가 봉안된 연호사에 함께 올라갔다. 대웅전 옆벽에 봉안된 순희의 어머니 위패를 보고 순희와 함께 합장 인사를 했다. 그날 해가 질 때까지 강변을 걸으며 부산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에 순희는 울었다.
나는 낮에는 논밭에 나가 아버지와 함께 가을걷이 일을 했다. 밤에는 부산서 사 온 『창작실기론』과 읍내 서점에서 산 월간 『현대문학』을 읽으며 소설 공부를 했다. 농촌에는 항상 일손이 부족해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일을 한다. 열 살 아래 어린애는 소를 먹이고, 열 살이 되면 들일을 한다. 논에서 벼를 베고,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산에서 나무를 하고, 무엇이든지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했던 농사일이라 벼 베기도 일꾼 못지않게 잘했다.
가을걷이가 끝나갈 즈음 순희가 만나자고 연락해 함벽루에서 만났다. 순희는 혼자 법당에 들러 어머니 위패에 문안하고 함벽루로 내려왔다. 무슨 말을 할 듯하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저물녘 우리는 강변을 지나 중학교 농장을 두르는 둑길을 걸었다. 늦가을 어둠은 빨리 왔다. 어둠 속에 그대로 걸었다. 어둠에 비친 순희의 옆모습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날은 말없이 걷다가 남정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에서 그대로 헤어졌다. 그곳은 합천읍과 순희가 사는 율곡면과 내가 사는 대양면이 교차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