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오피니언)칼럼

합천신문사 거덕사지 탐방-만수동(萬壽洞) 역사루트를 찾아(23)

하재효
논설위원

합천신문사 임직원은 10월 17일 대가야시대의 절터인 거덕사지(擧德寺址=해인사 홍제암에서 2Km)를 탐방하였다.
필자는 40여년 간 거덕사의 실체에 대하여 연구하던중 해인사 홍제암 원감(道峯 朴宗性)스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근거 자료와 현장 탐방을 통하여 궁금증을 해소하게 되었다.

1. 거덕사지(擧德寺址)
거덕사는 해인사에서 서쪽으로 홍제암을 지나 개금불로 가는 도중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에 의하면 해인사 서쪽 양계(兩溪)가 교호(交滸)하는 지점에 난야(蘭若)가 있으니 이가 곧 거덕사(擧德寺)이다. 과거 대가야국(大伽倻國) 월광태자(月光太子)가 처음으로 불연(佛緣)을 맺은 곳이라 한다. 여기에 있던 괴탑(壞塔)은 1926년에 큰절 명부전(冥府殿) 정중(庭中),현재는 대비로전(大毘盧殿) 앞에 이안(移安)하였다. 해인사를 창건(創建=서기802년)하던 때에는 이미 이 절은 폐사(廢寺)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_이지관 편저 해인사지)

2.월광사지(月光寺址)
월광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에 있었다. 월광은 6가야국중 대가야국(현재의 高靈이 그때의 首都) 이뇌왕(異惱王)의 태자(太子)인데 대가야국은 A.D.42년 임인(壬寅)에 현재의 고령읍에 이진아고왕(伊珍阿鼓王)이 개국하여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凡 16世 520년간 지속하다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신라의 진흥왕 23년(562)에 신라의 대장 김이사부(金異斯夫)와 김사다함(金斯多含)들이 공격함에 이때 대가야국 태자인 월광이 그들과 싸우다가 현 월광사 터에서 장열한 죽음을 하였으므로 그의 복(福)을 빌기 위해 절을 짓고 월광사(月光寺)라 이름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월광사가 어느 때 폐사(廢寺)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71년 봄에 보광당 김주성 화상(普光堂 金周成 和尙)이 재건하고 그 해 음력 4월 8일에 봉불식(奉佛式)을 가졌다. 이 절에는 二成基壇 新羅式 一般의 三層石塔이 동서로 약 50m 간격으로 세워져(보물 제 129호:月光寺址 三層石塔) 있다.(출처,李智冠_編箸 海印寺誌)

3. 불교 전래 시기
(1)고구려: 소수림왕2년 (372) (2)백제: 침류왕 1년 (384) (3)신라: 법흥왕 15년 (528) (4)가야: 김수로왕 설 (42~48) (5)대가야: 연대 미상이나 해인사(802)보다는 최소한 240여 년 빠른 것으로 추정됨.(출처_삼국사기)

4. 현장 탐방으로 확인돤 점
(1)축대(築臺): 三段 (2)초석(礎石): 多數 (3)倒壞된 塔: 基壇部,塔身部 等 多數 (4)디딜방아 받침석 (5)기와 破片

5. 지리적 위치
(1)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사람이 다니는 지름길로 많이 활용된 흔적아 있다. (2)산 중턱에 넓은 평지(平地)가 형성되어 안정감(安定感)이 느껴진다 (3)築臺와 礎石이 正南을 바라보게 되어 밝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4)水源이 풍부하다고 한다.

6. 본 연구를 통하여 얻게 된 점
▶거덕사지와 월광사지는 대가야국의 왕실과 佛緣을 맺은 곳으로 이뇌왕과 월광태자는 이 두 절에서 운명을 다했음을 알게 되었다.
▶해인사 큰 절 대비로전(大毘盧殿) 앞의 삼층석탑 1~2층의 옥계석과 그 사이 기둥의 색깔은 거덕사지에 있는 괴탑의 색깔과 같다.
▶눈으로 확인 가능한 흔적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지하에 보이지않은 유물 유적이 많을 것 같다.
▶거덕사앞의 兩溪 중에서 관음골을 끼고 삼정 마장 쪽으로 가는 통로는 대형 자동차도 넘을 것 같다
▶이 절의 규모는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인다.
▶거덕사는 개소리 닭소리 들리지 않은 곳에 숨어서 사는 孤高하고 滔滔한 절이었다.
▶거덕사는 앞으로 우리가 만나고 같이 숨쉬게 될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다.
▶월광사는 월광태자가 심어놓은 忠과 孝의 얼이 숨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