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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것들 (마을관리) – 佑岩강기수 수필가

나는 1942년생이다.
80여 년 살아오면서 바뀌고 변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기억나는 몇 가지를 적어 보면 우선 나의 나라가 변했다. 나는 1942년생이니까 나라 없는 일제하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엄격하게 말하면 나는 일제하에 태어났으니, 국적은 일본이다.
1945년 대한민국이라는 국명을 가지면서 남의 힘으로 독립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외 연방국이 일본에 승리하면서다. 그 승리는 원자폭탄 때문이라고 할까? 그로인해 우리나라가 독립하게 된 것이다.
흔히들 독립군에 의해서 나라를 되찾은 것 같은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애국하는 독립투사 같은 분이 있었기에 나라가 독립할 수 있었음을 부인 해서는 안 된다.
연이어 1950년 6.25 북괴가 남침했다. 그들이 나라의 끝 경상도 우리 집에까지 긴 장총을 메고 들어왔다. “삽주세요. 삽” 하면서.. 삽이 뭔지 우리는 몰랐다. 알고 보니 ‘수건포’를 삽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그 당시 이웃 몇 집을 반이라 하였고 반장이 있었다.
그리고 동네에는 이장이 있었고. 그분의 보수는 가을이 끝나면 집집을 돌면서 벼를 몇 되 드렸고, 보리타작 후에는 보리 몇 되를 드렸다. 그것으로 1년간의 보수요, 대가였다.
그뿐인가. 우리 마을에는 ‘골롱’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마을에 알릴 사항이 있으면 ‘안산’이란 낮은 앞산에 올라가 크게 외쳤다. 그러면 동민들은 뭐라고 외치는가를 들으려고 서로 조용히 하라면서 귀를 기울이며 들었다. 그런 후 못 들은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고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한번더 계도를 하였다.
그분과 그분의 가족들은 동사무소를 지키면서 청소도 하고, 회의가 있으면 방이 따뜻하게 군불도 넣고, 또 동네를 찾아오시는 손님이 있으면 식사도 준비해 주는 일을 하였다. 그분들의 집도 동네에서 지어놓은 동회관에 따른 건물이다.
그분이 하는 일이 또 있다. 마을의 길흉사(吉凶事)가 있는 집에 제일 먼저 가서 거들어 드릴 것이 있는지, 심부름할 것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그 집의 행사가 끝날 때까지 일을 거들어 주었다.
특히 흉사일 때에는 마을에 상포계라는것이 몇 개가 있었다,
마을이 크기 때문에 몇 개다. 그러나 그분은 그에 간여치 않고 참여하여 일을 했다. 그때의 상가 일은 상여를 만들기 위한 꽃도 직접 만들어 꽂았고 상여줄도 벳단의 짚으로 세 가닥으로 꼬아 만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여 공동작업으로 했다.
그럴 때마다 그분이 끼어들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그분의 아들, 장남이 나보다 두해 후배 였는 데, 그 아버지는 40대였을까? 그분의 부인도 몸을 아끼지 않고 흉 길사에 열심히 일해 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가족을 동네 ‘고지기라’ 불렀고, 애들이나 어른이나 그분의 이름을 예사로이 불러도 예, 예, 하였다.
쉽게 말하면 그때까지 마을의 종(從)이었다.
그분의 손이 필요할 땐 누구라도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분의 보수도 베 수확이 끝나는 가을과 보리타작 일이 끝나는 때에 가마니를 지고 집집을 돌면서 그 집의 정도에 때라 몇 되씩을 받는 것으로 1년 요료(일싹)가 되었다.
이 제도가 6.25가 끝나면서 사람들의 많은 이동으로 그분들이 우리 마을을 떠나, 도시로 가면서 없어졌다.
이장제도가 변하여 지금은 준 공무원이되어, 행정에서 다 달이 월급으로 보수를 지급한다. 그뿐이 아니고 의료보험. 국민연금, 4대 보험금도 납부해 준다.
또 농협에서 매월 보수를 지급해 주니 선호하는 직업이 되어 새해 초가 되면 이장으로 선출되기 위한 로비도 하고, 심한 경쟁으로 준 공무원이 된다.
지금은 마을마다 마이크 방송이 설치되면서 방송으로 알리니까, 슬그머니 없어진 것은 ‘골롱’이다. 그분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걸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