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먼 북소리(3) 삼가향교 가는 길, 280여 년의 먼 시간을 넘어 – 최효찬 작가, 수필가. 문학박사
1740년 초봄, 삼가현 옥계면에 사는 선비 사첨(士瞻) 최응률(崔應嵂)은 이른 새벽부터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튿날 삼가향교에서 거행될 춘계 석전대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세상은 평온하지 않았다. 12년 전 일어난 무신정변의 상처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변에 경상우도 사람들이 적극 가담했다는 이유로, 조정은 이 지역 유생들의 과거 응시를 금지했다. 합천과 삼가, 거창과 안음 일대는 노골적으로 반역향(反逆鄕)으로 지목되었다. 훗날 대구 경상감영에 세워진 평영남비에는 그 차별의 기록이 역사에 새겨졌다.
지천명을 맞은 사첨은 여덟 살 위 형 성첨(聖瞻 崔應徵)과 함께 큰집 종형 숙첨(叔瞻 崔應泰)을 모시고 길을 나섰다. 옥계에서 삼가향교까지는 80리. 하루 길로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더구나 숙첨 형님은 일흔여섯의 고령이었다. 집안에서는 만류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무신정변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선비들을 기리는 자리라면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문중에서 십시일반 비용을 모아 가마를 마련했다.
이른 새벽 옥계를 떠난 삼종형제는 종일 길을 걸었다. 산길과 들길을 넘고 또 넘어,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삼가향교에 닿았다. 열 시간이 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지난해 8월 폭염이 지속되던 어느 날, 나는 삼가향교 향안(鄕案)을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종친회 일을 돕다가 문헌 기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였다. 삼가향교 향안 입록의 당파성을 분석한 한 논문을 통해 우리 문중 선조 다섯 분의 이름이 이 향안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안(新案)’이라 적힌 향안을 펼쳤다. 1652년 병신년에는 崔慶文이, 1740년 경신년에는 崔應泰·崔應南·崔應徵·崔應嵂이 입록되어 있었다. 문중의 종손 부자와 종형제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나의 7대조 휘(최응률)도 있었다. 향안은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기며 옛 선비들의 기록을 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선조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박홍제 전교께서 말했다. “선조들이 다니던 향교에 젊은 사람이 찾아왔으니, 앞으로 일을 좀 해주면 좋겠어요.” 손사래를 쳤지만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지난 1월 19일, 고향에 사는 심재(深齋 崔永業) 님이 전화를 주셨다. 나는 항렬만 높아 문중 분을 만나면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애를 먹는다. 항렬로 손자뻘이지만 연배가 한참 위인 심재께서는 서울에 살다 귀향해 옥계서원 관리자와 삼가향교 장의를 맡고 있다.
“아재, 올해부터 삼가향교 장의를 맡아 주이소. 내가 십 년 넘게 했는데 이제는 좀 내려놓아야겠소.” 나는 향교 일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며 사양했다. 그러나 마땅한 사람이 없다며 결국 내가 맡게 되었다.
나는 서울에 산다. 1987년 고향 집이 수몰된 이후로는 고향을 거의 찾지 않았다. 그러다 2014년 작은 집을 짓고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내려가고 있다. 종친회 일을 거들기 시작하면서 오래된 문헌을 찾아 확인하는 일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그 과정에서 가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선조들은 어떤 신분으로 어떤 세월을 살았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선조들의 이야기를 거의 알지 못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집안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어쩌면 침묵의 배경에는 무신란의 먼 기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문중 자료에는 당시 역적으로 몰린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선조들의 삶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총회가 열린 지난달 27일, 술곡리 옥계서원 아래 고향 집에서 삼가향교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은 47분이 걸린다고 알려주었다. 280여 년 전 선조들이 10시간 넘게 걸어 도착했던 그 길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이날 허광영 신임 전교에게 장의 위촉장을 받았다.
며칠 뒤 춘계 석전대제가 열린다. 옛날 80리 길을 걸어 대성전에 올랐던 선조들의 자리. 286년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 후손인 내가 서게 되는 것이다. 수백 년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잔잔한 파동이 느껴진다.
요즘은 문중 일이라 하면 고리타분하다며 멀리하는 시대다. 향교 또한 유림이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형편이다. 시대착오적인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세월 속에서 향교의 건물은 조금씩 풍화되고 있다. 이제는 이름만 남은 향교에서 장의는 과연 무엇을 할꼬.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의미 있는 일들로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 속에서 오히려 삶의 의미가 드러나기도 한다. “밝음(옳음) 속에 어둠(나쁨)이 있고, 어둠 속에 밝음의 씨앗이 있다”(陽中有陰 陰中有陽). 『주역』의 말처럼 말이다.
언젠가 선조들이 다니신 삼가향교 가는 80리 길을 문중 분들과 함께 걸어보고 싶다. 삼가향교 가는 그 먼 길에서 고인(古人)을 만나 뵐 수 있을지. 혹여 고인을 뵐 수 없어도 여정의 고단함은 체험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글을 쓰다니, 내가 나이가 좀 들긴 들었나 보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