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합천군 행정동우회원 단종의 유배지 영월을 찾아서 (1)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합천군 행정동우회(회장:백남진)에서는 11월23일 아침 8시에 합천을 출발하여 회원 60명이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다녀왔다. 단종은 1441년 7월23일(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이다. 현덕왕후는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를 나은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양씨의 손에서 자라났다.
8세가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제학 윤상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세종32년)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해 7월20일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18일 문종이 재위 2년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자 단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제6대 왕에 즉위하였다.
계유정난이후 1455년 6월11일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15세에 상왕이 되었으며(재위기간 1452~1455[3년2개월]) 성삼문, 박랭년, 하위지 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 1457년(세조3년) 노산군으로 강복된 뒤 1457년 윤 6월22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돈화문을 출발하여 다셋만에 영월 땅 주천에 당도했다.
주천에 있는 마을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푼 뒤 공순원 주막 에서 유배길 행차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이 지금도 ‘어음정’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
다시 출발한 단종은 배일치 고갯마루에 도착하여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지금 배일치 고갯마루에는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창덕궁을 출발한지 7일후인 윤6월28일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여섯째아들인 금성대군이 다시 그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내려지고 결국 죽음을 강요당해 1457년 10월24일 유시에 단종은 이곳에서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께 사약을 진어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며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읊은 시조가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을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영월에 12시에 도착하여 중식을 끝내고 처음 들린 곳이 단종역사관이다. 2002년 문을 연 단종역사관은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의 생애와 사육신의 충절을 되새기기 위하여 세운 전시관으로 단종이 잠들어 있는 세계유산 조선왕릉 영월장릉(사적 제196호)내에 위치해 있다.
외관은 전통한옥으로 건축되어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며, 1층은 주제별로 전시실이 마련되어 단종의 세자 즉위에서부터 단종대왕으로 복권되기까지의 일대기를 차근차근 볼 수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서 특별전시실과 단종유배길, 단종문화제에 관한 자료, 세자의 궁중생활을 엿 볼 수 있는 자료들을 둘러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약 500m쯤 위로 올라가면 단종의 능 장릉(세계유산사적 제196호)이 있는데, 이 장릉은 단종이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아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었다. 세조가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단종은 죽은 후에도 편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영월지방의 호장이었던 ‘엄홍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지고 동을 지산 능선을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쌍여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 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