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해인사 백련암과 성철스님 (1)

이병생
합천문화원향토사 연구소장

해인사 통제소를 지나 한참 올라가다 보면 백련암, 지족암, 희랑대, 국일암으로 가는 안내판이 나온다. 오르막길을 따라 약2㎞쯤 올라가면 천해의 경관을 이루는 백련암을 만날 수 있다. 이곳 백련암은 수도처로서만이 아니라 노송백수(老松柏樹), 기암절벽(奇岩絶壁), 춘하추풍(春夏秋風), 두견야체(杜鵑夜체), 백운멱봉(白雲冪峰), 풍뢰만규(風賴萬竅)등 자못 해인사 산내 암자 중에 제일로 꼽는 기도처이다. 주위에는 서남쪽의 용각대, 서쪽의 봉황대, 뒤쪽의 절상대, 동쪽의 환적대와 신선대 등이 특히 전망이 활개하여 예부터 도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즉 환적의천, 풍계명정, 성봉, 인파유안, 활애성여와 같은 고승들이 모두 이암자에 있었다. 돌 앞에 있는 불면석(佛面石)은 천연의 한 덩이 거암이 반석위에 얹혀있는 것이 불면과 비슷하다는 데서 이름 하였다. 백련암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조선선조38년(1605) 소암대사(昭庵大師)가 중창하였다는 기록부터 나오는데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적광전과 고심원, 원통전, 영자당, 요사채 등이 있다. 1993년 성철스님은 입적하시기 전까지 주석하였다.
해인사 백련암은 옛날부터 훌륭한 스님들이 많이 수행을 하였는데 그중에 환적(幻寂)스님(1603~1690)이란분의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환적스님은 조선시대 사람으로 열한 살이 되던 해에 속리산 복천암에 출가하였다. 스님은 여든 한 살의 노년에 이르러 가야산 백련암 위에 환적대라는 토굴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동자 한명을 데리고 정진하였다. 그리고 1690년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여든여덟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환적스님이 환적대에서 정진하고 있을 때에 가끔씩 호랑이 한 마리가 스님 앞에 와서는 고개를 수그리고 앉았다. 그러면 스님은 호랑이에게 “금생에는 축생의 몸을 받았지만 다음 생애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공부하거라.”고 설법을 하시곤 하였다. 이렇게 더러 찾아와 법문을 듣고 하던 그 호랑이는 스님이 나들이를 하실 때에는 등에 스님을 태우고 가야산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였다. 어느날 동자승이 나들이에서 돌아오실 스님을 위하여 공양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도마질을 하던 동자승은 자칫 실수하여 손가락을 베었다.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을 아깝게 생각한 동자승은 호랑이 입에 피를 떨구어 주었다. 그러자 피 맛을 본 호랑이는 육식을 하던 습관이 되살아나 동자승을 잡아먹고 말았다. 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던 스님은 으레 마중나오고 하던 동자승과 호랑이가 그날따라 보이지 않아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동자는 보이지 않고 호랑이만이 풀이 죽어 어찌 할 바를 몰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핏 자국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스님은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 차렸다.
환적스님은 호랑이를 크게 꾸짖고 나서 가야산 산신령을 불러 다시는 가야산에서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죽는 일이 없게 호랑이가 가야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그 뒤로는 가야산에서 사람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일이 없다고 한다.
다음은 성철스님의 행장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퇴옹당 성철대종사께서는 1912년 임자 음2월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합천이씨 가문에서 태어나서 엄부는 상언이시고, 자모는 진주강씨 이시며 속명은 영주라 하였다. 유년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을 마친 뒤로는 남에게 더 이상 배운바 없이 스스로 학문을 대성하셨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모든 경서와 신학문을 두루 섭렵하였으나 진지(眞知)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에 공허함을 느끼던 즈음 한 노스님으로부터 영가대사의 증도가를 받아 읽고 홀연히 심안(心眼)이 밝아짐을 느꼈다. 20세 전후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지리산 대원사 탑전에서 정진한 뒤 40여일 만에 문득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화두가 동정일여(動靜一如)에 이르고 가야산 해인사로 떠나면서 출가시를 읊었다.
彌天大業紅爐雪(미천대업홍로설)이요, 跨海雄基赫日露(과해웅기혁일로)라.
誰人甘死片時夢(수인감사편시몽)가 超然獨步萬古眞(초연독보만고진)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로 불에 한 점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그해 봄 해인사 백련암에서 동산(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하고 같은 해 운봉화상(雲峰和尙)으로부터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이후 범어사 금어선원, 금강산 마하연 등 남북 제방선원에서 안거하셨으며, 29세 때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마침 칠통(漆桶)을 타파하시고 오도송을 읊었다.
黃河西流崑崙頂(황하서류곤륜정)이여 日月無光大地沈(일월무광대지심)이라
遽然一笑回首立(거연일소회수립)하니 靑山依舊白雲中(청산의구백운중)이로다.
황하수 서쪽으로 흘러 곤륜산에 치솟아 오름이여,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장좌불와로 고행정진하시니, 언제나 안목이 투철하여 그 선기(禪機)를 당 할자가 없었다.
1955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시고 팔공산 성전암으로 옮겨 철망을 치고 10년을 동구불출(洞口不出)하여 도광(道光)을 숨기셨다. 1967년 가야산 해인총림 초대방장에 추대되시고, 백일 법문을 열어 무량중생을 제도하기 시작하셨다. 198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시고, 1991년 제7대 종정에 재추대 되셨으며 종문(宗門)의 이론서인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저술하고 상당 법어집인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발간하시고는 부처님께 밥값 하였다고 흔연해 하셨다.
이후 스님의 말씀과 종문의 핵심어록에 대한 스님의 강론을 엮은 10여종의 책과 스님께서 몸소 선정하여 번역하게 된 선종의 주요어록 37권을 함께 묶은 선림고경총서를 발간하니, 종통과 설통을 겸비하신 스님께서 현대한국선종에 끼치신 바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또 스님께서는 종단행정에는 일체 관여치 않으시고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으나 전혀 나아가지 않으시며 산승은 오로지 청산에 머물 뿐이라고 하셨다. 결제안거 중에는 산중에 비구, 비구니를 비롯한 사부대중이 항상 5백명이 넘게 운집하여 정진하였으니, 오늘날 동양 삼국에 이와 같은 예는 없다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