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여론마당(오피니언)

대한제국 때 ‘삼가 의병단(三嘉 義兵團)’은 ‘정의에 앞장서는 남명 및 내암 정신’이다. (1)

조찬용
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사업회장

대한제국 때 ‘삼가 의병단’이 삼가·가회·대병·묘산·산청·거창 등지에서 전개한 의병전쟁은, 1919년 삼가·대병·대양·초계 등 합천 3·1만세운동에 크나큰 영향을 줬다.
1908년 5월 일본 경찰이 체포·심문(고문) 후에 작성한 이차(21세) 이소봉(18세) 한치문(57세) 김화숙(24세) 김찬숙(21세) 김우옥(31세) 김응오(29세) 장명언(23세) 진술서다.

『1908년 5월11일 오후 8시경 삼가군 문송면(주: 현 합천군 삼가면 문송리) 불동(주: 불당골)에 살고 있는 이차봉(李且奉), 아우 이소봉(李小奉) 두 사람은 함께 공모하여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고 총검을 지니고 5월 8일, 9일 양일 삼가군 덕지면(德旨面) 지리동(주: 가회면 함방리 일원) 에 사는 김향장의 집을 습격했다. 이에 삼가 주재소 경찰은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변장하여 5월 11일 밤 11시에 불동에 도착했다.
문송면 불동은 산간벽지이고 호수(戶數)는 4호이며 이차봉의 집은 산악 절정에 있어 사방이 산으로 에워싸여 이들이 도주하면 발견하기 대단히 곤란하고 다시 체포하기 불가능함으로, 도중 경계를 하면서 이차봉 집을 포위하여 한인 순사가 이(李)의 거택을 심문해 “이차봉이 누구냐”고 묻자, “내가 이차봉이다”는 말을 듣고, 다시 “이소봉은 어디 있느냐”고 추궁하자, “현재 여기 있다”고 곧 말했다. 수색 순사의 일행은 이들을 향하여 “예전에 소지한 총검을 내 놓으라”고 했으나, 이차봉·소봉의 말은 “자기들은 이미 폭도(주: 의병)가 아니고 총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에게 “순순히 내어 놓으라”고 하자, 집의 동쪽 모퉁이에 쌓여 있는 소나무 가지 나무 밑에서, 화승총 1정을 가져왔다. (주: 순순히 투항한 것처럼 일제가 왜곡한 것으로 판단됨)

그래서 다시 “한도(韓刀)를 내어 놓으라”고 우겼더니, “총 외에는 다른 물건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리 수색대는 집을 철처히 수색하니 칼집이 없는 칼 1정을 나뭇가지 밑에서, 또 방안 농속에서 칼집 및 한인 순사 제복, 견장 1조를 발견했다. (주: 산청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관급품을 노획한 것으로, 8명의 의병장들의 목적을 알 수 있는 주요한 자료임). 곧 이들 2명을 체포해 삼가 주재소에서 엄중 취조 중에 있다.
1908년 5월 12일 오전 5시 삼가 주재소에 인치(引致)한 이차봉 및 이소봉에 대하여 취조하니, 두 사람은 쉽게 실토하지 않아 엄중 취조(주: 고문) 결과, 드디어 아우 소봉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실토했다. (주: 심한 고문이 가해졌는데도, 兄인 이차봉의 진술이 없는 것으로 봐서 이차봉은 신념이 굳은 인물로 판단됨)
“자기들은 폭도 출몰 이래 자칭 ‘의병’이라 칭하고 각지를 횡행 출몰하여 금품을 강탈했고, 그 일단(一團)은 10여명으로서 자기 형은 이 단체의 ‘수괴(주: 우두머리)’라고 했다.
또한 이소봉은 “남은 8명은 삼가군 감한면(甘閑面) 사동(沙洞, 주: 내사 및 외사리)에 사는 자로서, 그 이름은 김화숙(金華淑) 김찬숙(金贊淑) 한치문(韓致文) 김우옥(金羽玉) 김응오(金應五) 장명언(張明彦)이며, 주소와 소속 단체를 모르는 자로서는 안유만(安柳萬, 주: 삼가면 내문마을 거주로 추정)과 신개동(申介東)이라는 자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이 8명 중, 화승총을 휴대한 자는 3명, 순사의 외투를 소지한자 1명이다”라고 진술함에 따라, 이들 8명을 체포하기 위해 5월 12일 오후4시 삼가 주재순사 호사끼 및 니시가와 2명의 일본 순사와 한인 순사 3명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주: 현 가회면 외사 및 내사마을)으로 급히 출발했다.
1908년 5월 12일 같은 날 오후 6시에 도착한 후, 혐의자 가택을 수색하여 6명을 체포, 다음날인 5월 13일 오전 7시에 돌아와 이들을 엄중 취조(주: 고문) 중에 있다. 체포자는 다음과 같다.
삼가군 감한면 내사동(內沙洞) 김화숙 김찬숙 한치문 김우옥과, 외사동(外沙洞) 김응오 장명언이다.
이번에 체포한 폭도(주: 의병) 8명(주: 상기 6명과 이차봉·소봉)을 취조한 바에 의하면, 그들의 일행은 10명(주: 박수길 김팔용 이두익 등)으로서 이차봉 혹은 한치문이 수괴(주: 의병대장)가 되어 각지를 습격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강탈한 것을 보면, 1908년 4월 24일 이들 일당은 삼가군 대평면(주: 현 대병면) 모처(某處)를 습격하여 신화(新貨) 23원을 강탈하고, 4월 28일 합천의 어떤 민가를 습격하여 신화 17원, 엽전 8관(싯가 19원 20전) 목면 1필(가격 10원)을 약탈하고, 5월 1일 합천군 조세 영수원(領收員) 집을 습격하여 엽전 1관 300문(싯가 3원 10전)을 강탈했다. (주: 산청 주재소를 습격해 획득한 전리품에 대해서는 일제가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있음)
5월 18일 삼가 주재소에서 호사끼, 고지미, 니시가 등 3명 순사 및 병졸 4명과 함께 잔여 폭도(주: 의병)들을 체포하고자 폭도 8명을 앞세워 오전 8시 삼가를 출발하여 고현면(주: 대병면 일원)으로 가던 중, 삼가읍에서 서북쪽 1리의 산길(주: 하금리 뒷산 추정)을 통과할 때 갑자기 측면 약 600m 고지에서 비도(주: 의병) 10여 명이 나타나서 우리 일행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측면에 있는 폭도(주: 의병)는 우리 수색대를 사격하고 동행하는 상기 8명의 폭도(주: 의병)를 도주시킬(주: 구출할) 목적으로 공격을 했는데, 8명은 이를 알아차리고 곧 도주를 꾀했다.
이로 인해 우리 일행이 돌진하여 사격을 가하자 적(敵, 주: 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했다. 이 전투에서 도주를 획책한 (한치문 이차봉 등) 8명 모두를 사살했다. 이들은 전에 산청 주재소를 습격하고 가옥에 방화 관급품 일체를 약탈한 폭도(주: 의병)의 일부이다.』

상기 비도(주: 의병) 10여 명이 바로, 박수길(29세) 김팔용(42세) 이두익 성만석 신상호(46세) 등 ‘삼가 의병단’이다.
특히 ‘삼가 의병단(三嘉 義兵團, 주: 당시엔 ‘고현리 화적단’으로 명명)’의 박수길(1880년 경북 청도 출생, 1908.8.10 체포, 10.10 순국, 애국장)과 김팔용(1867년 삼가군 금리 출생, 박수길과 함께 체포된 후 순국, 애국장), 삼가군 출생인 이두익(李斗益, 1908.5.18 체포, 5.20 순국, 애국장), 삼가군 목동(가회면 목곡마을)의 성만석(成萬石, 1908.8.3 전사, 애국장), 봉산면 송림리의 신상호(申相鎬, 1873년생, 1908.8.31 전사, 애국장) 등 10여 명이 한치문 이차봉 등 8명을 구출하려고 작전을 전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1908년 당시 의병전쟁이 더욱 조직화·고도화돼 있었다는 게 증명된다. (계속)

%ec%a1%b0%ec%b0%ac%ec%9a%a9_▲정미의병전쟁 삼가 의병장 순국 기념비(丁未義兵戰爭 三嘉 義兵將 殉國 紀念碑)
합천군 삼가면 양천강변길 59 삼가장터 3·1 광장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