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의 인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바로 읽자(1)
류해을
합천문화원 이사
합천문화 제9호에 실린 무학대사비문은 1990년 6월 11일~12일 양일간 합천문화원에서 조사단을 구성하여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 있는 무학대사 비문을 탁본하여 춘산 이상학 선생께서 번역 하셨다.
조사단원은 진광호 신성재 변종철 윤규원 이인갑 박의중 김연 우한창 이천환 여만복 김성수님들께서 수고 하셨다.
이때까지 합천의 무학은 전설속의 무학이었으나 이 비를 접하고 난 후로는 실존 인물로 확인을 하고 대병 지역에 있는 대사의 유적지를 많이 발굴하여 왔다.
참고로 충남 서산에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1922∼1937년 보문사(普文社) 발간)에 보여진 생어군지간월도(生于郡之看月島)란 문구 하나로 여러 전설이 만들어 졌고 1989년에는 기념비까지 세우고 근거 자료를 찾다가 2003년 가을 우리 합천문화 제9호를 읽고 더 이상 시비를 하지 않고 합천인임을 인정해 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대사의 출생지를 의심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여기 26년 전 진광호 원장님께서 발간한 합천문화 제9호에 실린 무학대사비문을 옮겨본다.
회암사(檜岩寺) 묘엄존자(妙嚴尊者) 무학대사(無學大師) 비
조선국 왕사 대조계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 탑명 병서(並序)
가선대부(嘉善大夫) 예문관제학 동지경연 춘추관사 겸 판내선시사(藝文舘提學同知經筵春秋舘事兼判內膳寺事) 신 변계량(卞季良)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짓고,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 한성판윤 보문각제학(檢校漢城判尹寶文閣提學臣) 신 공부(孔俯)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쓰다.
태조 원년(태조 1, 1392년) 겨울 10월에 대사께서 상감의 부름을 받아 송경(현 개성)에 이르셨다. 태조께서 그달 11일 탄신을 기하여, 법복과 그릇을 갖추어 왕사(王師) 대조계종사(曹溪宗師) 선교(禪敎) 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로 봉하실 때에, 양종(兩宗) 오교(五敎)의 모든 선승들이 함께 하였다.
대사께서 법좌에 오르시어 향을 피우고 장수를 기원하신 뒤에 불자(拂子 : 먼지떨이)를 세우고 대중을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삼세의 부처님들도 말씀하시지 않았고, 역대의 조사들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대중은 알겠는가? 만일 마음·생각·입·혀가 서로 견주고 살펴서 말할 수 있다면, 어찌 우리 종파의 기풍이 있을 수 있으랴!” 하셨다.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유학은 인(仁)을 숭상하고 불교는 자비를 주장하나, 그 쓰임은 같습니다. 백성 보호하기를 갓난아이 보호하듯 하셔야 백성들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지극한 인(仁)과 큰 자비로 나라를 다스리셔야, 자연 만수무강하실 것이며, 자손과 사직이 편안할 것입니다. 지금은 나라를 여신지가 얼마 되지 않아 형법에 걸린 자가 많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너와 나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시고 모두를 용서하신다면, 신민들은 모두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또 나라의 영원한 복이 될 것입니다.” 하셨다. 태조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서울과 지방의 모든 죄수를 풀어주셨다. 당시 본관이 한산(韓山)인 목은(牧隱) 이문정공(文靖公 : 이색(李穡))이 대사에게 선물한 시 중에, “성군(聖君)은 하늘을 나는 용이요, 왕사(王師)는 세상에 태어난 부처라.”하는 구절이 있다.
태조께서 회암사(檜岩寺)는 나옹(懶翁)이 살던 큰 도량이라 하시며, 대사에게 들어갈 것을 명하셨다. 정축년(태조 6, 1397년) 가을, 절의 북쪽 벼랑에 탑을 세우라 하신 것은 대사의 스승이신 지공(指空)의 사리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무인년(태조 7, 1398년) 가을, 대사께서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용문사로 돌아가 기거하셨다. 임오년(태종 2, 1402년) 5월, 태종께서 또 회암사(檜岩寺)로 들어가라 명하셨다. 다음해 정월 또 사양하시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셨다. 을유년(태종 5, 1405년) 9월 11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3년이 지난 정해년(태종 7, 1407년) 겨울 12월, 상감께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에게 대사의 뼈를 회암사 탑에 모시도록 하셨고, 또 4년이 지난 경인년(태종 10, 1410년) 7월, 시호를 내리셨다.
상왕께서 태조임금의 뜻으로 상감께 말씀하시니, 상감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탑의 이름과 명(銘)을 짓도록 분부하셨습니다. 신 계량(季良)이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을 살피니, 대사의 이름은 자초(自超)요, 호는 무학(無學)이요, 계시던 처소는 계월헌(溪月軒)입니다. 속세의 나이는 79세시고, 불교에 귀의한 뒤의 나이(法臘)는 61세입니다. 속성(俗姓)은 박(朴)씨이고 삼기군(三岐郡) 사람으로, 아버지 인일(仁一)은 숭정문하시랑(崇政門下侍郎)에 추증되셨고, 어머니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입니다. 어머니 채씨가 떠오르는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해, 태정(泰定) 정묘(충숙왕 14, 1327년) 9월 20일에 대사를 낳으셨다. 강보를 벗어났을 때부터 다니면서 청소를 하셨고, 학당에서는 아무도 대사를 앞서지 못했다.
18세에 기쁘게 부처에게 귀의할 뜻을 품으셨다. 혜감국사(慧鑑國師)의 뛰어난 제자 소지선사(小止禪師)께서 머리를 깎아주시고 구족계(具足戒)를 주셨다. 용문산(龍門山)에 가셔서 혜명국사(慧明國師) 법장(法藏)께 법(法)을 여쭈니, 국사께서 법을 보여주시고, 이어 “바른 길을 얻을 자, 너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하시며 부도암(浮圖庵)에서 살게 하셨다. 어느 날 암자에 불이 났는데도, 대사께서는 나무 인형같이 조용히 앉아 계시니 대중이 이상히 여겼다.
병술년(충목왕 2, 1346년) 겨울, 『능엄경(楞嚴經)』을 보시고 깨달으신 바가 있어 스승에게 돌아가 고하니, 스승께서 더욱 칭찬하고 감탄하셨다. 이로부터 침식을 잊으시고 참선하며 진리를 연구하는데 전념하셨다. 기축년(충정왕 1, 1349년) 가을,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로 가셔서 거쳐하셨다. [계속]